일기장/2006-07-30

 

Fr.ju.tR 오프가 또 간만에 있었다. 마침 오늘은 프로리그 결승전이 있는 날. 스타 길드가 모였으니 스타 중계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간만에 또 빅 매치다. 절대 강자 T1과 신흥 강호 MBC. 결승전은 이런 구도가 재밌다. 라이벌전이나 적이 만나거나 전통 강호가 만나거나 하는 것도 재밌지만 그보다 가장 재미 있는 것은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자와 혜성처럼 나타나서 강호들을 쓰러뜨리고 올라온 신예의 대결이다.

T1은 지난 시즌 트리플 크라운, 이번 시즌도 정규리그 우승으로 광안리에 직행했다. 비록 7승 3패가 3팀이 나와서 승점차로 우승이 된 거긴 하지만 그 과정은 분명 남다르다. 소울팀과의 대결, 임요환이 한승엽에게 핵을 맞자 T1은 이걸 관광 모드로 간주하고 주훈 감독은 팀원들에게 이후 한 게임도 내주지 말라고 말한다. 사실 T1이야말로 관광 모드 최고의 가해자였는데 그렇게 화내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어쨋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감독은 T1의 감독 뿐이다. T1은 그 말대로 내리 3게임을 따내고 승리했다. 마지막 경기, 팬택과의 대결. 팬택도 이윤열 원맨팀이란 소릴 듣긴 해도 어쨋든 강팀이다. 3승 전승으로 이기면 광안리 직행, 1패나 2패를 할 경우 순위 결정전을 할 가능성이 있고 질 경우 바로 상대인 팬택에게 자리를 내주고 포스트시즌 좌절될 수도 있는 상황. 여기서 T1은 이겨야 할 때 이길 줄 아는 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며 3:0으로 팬택을 셧아웃시킨다.

MBC 히어로도 만만치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박성준 원맨팀으로 불리면서 포스트시즌에는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엔 T1와 같은 7승 3패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승점 때문에 4위라서 준플레이오프부터 치렀는데 준플레이오프 상대 KTF를 4:0으로 스윕해버린다. KTF가 정규리그에만 강한 팀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4:0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후 전 선수가 에이스라는 CJ와의 대결. 여기서도 CJ의 3인방 중 둘, 변형태, 서지훈을 1, 2경기에 잡고 3경기 팀플까지 잡으면서 3:0으로 앞서 나가고 이어 2경기를 내주긴 하나 6경기에서 마무리, 4:2로 승리했다. 작년 삼성이 T1에 도전할 때와 비슷한 기세다. 하지만 삼성은 T1급의 뚜렷한 에이스가 없다는 약점이 있었던 반면 MBC 히어로는 박.지.성 라인이라는 리그 정상급 3인방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T1을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첫 경기. 전설만 남은 임요환과 떠오르는 신예 염보성. 임요환에겐 안된 말이지만 대부분 아마 염보성의 우세를 예측했을 것이다. 임요환은 때때로 당대 최고의 선수를 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저 그런 선수에게 지기도 한다. 사실 그런 면에서 MBC 히어로의 에이스 염보성과 붙게 된 것은 T1에겐 행운이기도 하다. 운 좋게 이기면 좋은 거고 지더라도 상대 에이스에게 한 판 내주는 거니까 별 부담 없다. 그런데 임요환은 초반부터 이러한 예상을 깨뜨린다. 견제와 빌드에서 눈꼽만큼 씩이지만 앞서 나갔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염보성의 작전까지 눈치채고 대비했다. 정말 한 타이밍만 버티면 낙승으로 가는 순간, 근데 그 순간을 노리고 염보성이 치고 나왔고 한 방에 뚫려버렸다. 결국 경기 내용은 예상과 달랐지만 경기 결과는 예상대로.

사실 엔트리를 보자마자 딱 4:1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요환은 프로리그 결승전에 나와서 이긴 적이 거의 없다. SKY 프로리그에선 아마도 전무하고 팀리그 결승에선 1승을 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1은 늘 결승에서 이겼다. 이번에도 그런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이후도 예상대로 흘러갔다. 전상욱, 염보성과 함께 요즘 최고의 기세를 올리는 테란이다. 플레이오프에서 다소 빈약한 경기력을 보였던 이재호가 이길 리가 없었다. 초반에 빌드의 불리함을 딛고 선전하긴 했지만 결국 전상욱의 돈질에 밀리고 만다.

팀플은 못 봤으니 패스, 박태민 대 문준희. 역시 누가 봐도 박태민 우세. 나도 박태민의 절대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문준희가 앞서 나갔다. 초반 빌드부터 박태민이 약간 꼬였고 문준희의 타이밍 좋은 러시로 박태민이 멀티 밀리고 본진까지 타격 받으면서 위험했는데 그 와중에 박태민은 뮤탈을 빼돌려 문준희 본진을 초토화시키고 다시 돌아와서 수비에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카운터, 피니시. 첫 경기와 마찬가지로 경기 내용은 예상과 달랐지만 경기 결과는 예상대로.

5경기 고인규 대 박성준. 세 달 전이었으면 박성준 절대 우세였겠지만 박성준의 포스는 예전 같지 않은 반면 고인규는 최근 듀얼 토너먼트를 통과했고 마재윤, 조용호, 이윤열 등 정상급 선수들을 연달아 격파해서 기세가 오른 상태. 엇비슷하지만 난 고인규의 손을 들어주었다. 팽팽한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무언가 계속 고인규의 힘이 박성준을 내리 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상 적중, 결국 박성준의 패배로 T1의 4:1 승리가 결정되었다.

전반적으로 예상이 거의 들어 맞아서 재미 없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T1의 막강함이 주는 그 무게감이 뇌리에 남았다. T1은 참 특이한 팀이다. 에초에 임요환 원맨팀으로 시작했고 받쳐 주는 멤버도 별로 없었는데 스폰서도 없는 상태에서 우승하기도 했었고 임요환이 하락세가 되면서 때마침 최연성을 키워내서 최연성 원맨팀으로 역시 우승, 그리고 지금은 거의 선수 전원이 다른 팀 가면 에이스급인 그런 팀이 되었다. 박태민과 전상욱처럼 다른 팀에서 좋은 선수를 영입해오기도 했지만 최연성 같은 대어를 키워내기도 했고 계속 팀플에만 활약하던 고인규, 윤종민은 이제 메이저리그를 두드린다. KTF는 끊임 없이 다른 팀에서 에이스급 선수를 영입해왔지만 늘 포스트시즌에서 실패했고 CJ도 선수 전원이 에이스라는 소리도 듣고 많은 개인리그 우승자를 배출했지만 2004년 이후로는 포스트시즌에서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T1은 다르다. 정규리그에선 부진할 때도 있고 슬로우 스타터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경기,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이길 줄 안다. 그렇다고 선수들이 모두 늘 개인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최근 시즌의 양대 리그에는 결승전에 한 명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이 팀으로 붙는 프로리그의 중요한 경기에서 그런 정상급 선수를 만나면 이겨낸다. 스타크래프트 경기는 팀 경기라고 해도 결국 1:1, 2:2로 한 경기씩 하기 때문에 딱히 팀웍이란 게 승패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도 같은데 T1은 그게 아니다. 단순히 선수 하나하나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니라 팀 전체가 뭉쳤을 때 풍기는 포스가 있다. 궁금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감독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T1의 주훈 감독과 MBC 히어로의 하태기 감독. 몇 년째 프로리그를 재패하고 있는 T1의 주훈 감독의 역량이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태기 감독, 비록 T1에 지긴 했지만 에시당초 출발선이 달랐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선수 기용, 신예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능력, 적절한 스카웃을 생각해본다면 주훈, 김가을 감독과 대등한 역량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선수 끌어와서 썩히는 팬택 감독은 언제 그만두려나. 사실 처음에는 스타크래프트 팀에 감독이 대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요즘 보면 팀의 성적이 감독의 역량과 거의 비례하는 것 같다.

내가 만약 제임스 콜린스처럼 성공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면 T1을, 아니 이 프로게임계를 한 번 연구해보고 싶다.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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