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MBTI가 ENTP에서 ESTP로 바뀌었다. 김창준씨의 설명에 의하면 N은 사물을 볼 때 숲을 먼저 보고 추상적인 사고 방식에 능한 것이고 S는 나무를 먼저 보고 실체에 접근하는데 능한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게 바뀐 것 같다. 예전에 나는 머릿속으로 큰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다. 무언가를 할 때는 늘 머리 속으로 다 그려놓고 시작하곤 했다. 그러다가 성향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XP를 하면서부터. 꼭 XP가 N보다 S랑 친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N에 치우쳐 있는 기존의 개발방법론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S에 가까운 느낌이다. Just Do It!의 느낌이랄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멋진 설계를 해내는 것보다 좀 허접하더라도 실제로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에 따라 성향도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 방식이 나한테 맞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무언가에 성공적이었을 때는 S적인 방법으로 시도했을 때였다. 고등학교 때 프로그래밍 동아리에 들었을 때도 그랬다. recursion을 처음 배우면서 선배가 하노이탑 문제를 내줬을 때 나 이외의 다른 애들은 전부 알고리즘 자체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냥 숫자만 입력 받고 결과도 숫자로 뿌려주는 걸로 문제를 풀어냈다. 근데 나는 알고리즘은 제쳐두고 일단 문제를 눈에 보이게 만들었다. 파스칼의 그래픽 라이브러리를 익힌 다음 세 개의 고리를 그리고 원판을 그려넣었다. 그러고 나서 알고리즘 구현을 시작했다. 미로찾기를 풀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애들은 모두 미로찾기의 풀이를 좌표 순서로만 찍어냈는데 나는 화면에 그렸다. 괘선의 방향까지 맞춰가면서. 열역학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다. 처음 몇 시간을 졸아버린 탓에 선생님이 떠드는 이야기는 전혀 알아먹을 수가 없었고 책을 봐도 이론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무작정 문제를 푸는 거였다. 풀다보니 어느 새 개념이 머리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도 N의 방식으로 살아왔던 것은 이런 S적인 방법이 몇 번 실패했기 때문인 듯하다. 올림피아드에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시간이 적다보니 조급한 마음에 평소처럼 시각화에 여유 있게 시간을 쓰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나왔고 결국 국내에서도 입상하지 못했다. 대학에 가서도 라인 트레이서 만들 때 알고리즘을 그래픽 시뮬레이션으로 먼저 만들어서 알고리즘을 확인하고 만들었는데 정작 그 알고리즘을 기계와 연결시켰을 때는 생각처럼 동작하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납땜 실수거나 회로 연결 찾오일 수도 있는데 그 때 난 엉뚱하게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괴리 따위의 생각이나 했었다. 사실은 좀더 S적인 방법으로 나갔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약간의 착각도 작용했다. 중학교 때 어렵다는 수학 문제를 머리로만 풀면서 내가 그런 걸 잘한다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중학교 수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내가 원래 머리 속으로만 문제를 푸는 걸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복잡한 수식이 나오는 단원은 맨날 헤맸지만 그래프나 도형 같은 게 나오는 단원은 잘 따라갔었으니 나에게 맞는 방식은 원래부터 S였을 것이다.
어쨋든 결과적으로는 S에서 시작해서 N을 거쳐 S로 돌아온 지금이 좋은 것 같다. 어떻게보면 XP에서 말하는 design enough to get going이랑도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