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08-03-19

이너게임, 내가 유일하게 독서목록에서 10점 만점에 11점을 준 책이지만 사실 이 책이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진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내가 습관적(?)으로 이너게임을 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너게임을 하지 않던 부분에는 적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난 어려서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는데 생각해보면 스포츠를 상당히 이너게임스럽게 대해왔던 것 같다. 승부욕이 강해서 경기 중에도 많이 타오르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self1의 간섭은 거의 없었다. 승부욕이 강해서 경기 중에 늘 활활 타오르면서도 승부를 의식해서 즐거움이 떨어지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승부의 긴장감을 즐겼고 그러면서도 스코어보다 내 플레이에 잘 집중했다. 축구에서는 공을 찬다는 그 느낌이 좋았고 자연스럽게 경기에 몰입이 되었다. 농구도 그 농구공을 만지는 모든 동작이 다 재밌었다. 특히 레이업을 할 때 그 손끝에 공이 걸리는 느낌, 그런 게 좋았다. 탁구나 배구, 족구 같은 것도 마찬가지. 그래서 내가 스포츠를 같이 배운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빨리 익혀왔던 것 같다.

그냥 원래 내 성격 자체가 약간 이런 감이 있다. 원래가 지 잘난 맛에 살다보니 self1이 self2를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런 걸로 의기소침해지는 경우도 별로 없고 자신감을 잃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예외도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당구다. 내가 처음 당구를 배운 건 고등학교 때 이미 300을 치던 선욱이한테서다. 이넘이랑 같이 치니까 이넘은 나한테 계속 가르치려 들었고 자기가 시키는 길로 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았고 계속 내 기술을 평가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당구는 재미가 없었고 거기에 돈 드는 스포츠라는 점도 작용해서 대학 때도 당구를 거의 치지 않았다. 그래서 당구 친 건 한 10번 되는데 아직 30이다. 보통 남자들은 당구 처음 치러 가서 2시간 정도 하면 50으로 올린다고 하는데-_-

합창도 그 중 하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의 합창단은 신입단원이 들어가면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to do와 not to do를 매일 매일 들어야 했다. 노래할 때 자세는 어때야 하고 호흡은 어때야 하고 배에는 힘을 어떻게 줘야 하고 목은 어때야 하고. 노래 외적인 부분에도 지각하면 안되고 연습 중간에 쉬는 시간에 말 많이하면 안되고 선배 말 잘 들어야 하고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 잘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고 등등. 게다가 더 암울했던 건 선배들이 말하는 합창의 즐거움이란 게 합창 자체의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보다 몇 달 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공연에 서서 노래를 완성했을 때의 보람과 감동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그 감동이란 게 노래 자체가 주는 그런 감동이 아니라 "와, 우리가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서 이걸 해냈구나"하는 감동이었다. 그래서 이에 실망해서 선배들한테 문제 제기를 했더니 그에 대한 반응도 비슷했다. 니가 열심히 안해서 그래, 혹은 열심히 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게 있어, 혹은 미치면 미치고 안 미치면 못 미친다 등등. 난 합창이 이래서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명도.

그런데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더 합창이란 걸 정복(?)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리고 점점 나 자신도 self1이 날 지배하기 시작했다. 뭔가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합창의 즐거움이란 걸 잘 못 느꼈다. 그러면서도 4학년 때까지 계속했고 어찌어찌 파트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게 내 인생 최악의 코칭 경험이 되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보니 자신 있게 후배들을 가르치지 못했고 심지어 한 사람의 단원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건 그 때의 내 후배들이 나보다 훨씬 더 합창을 잘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남에게 outergame을 강요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의 불만족은 너무나도 컸다.

어쩌다보니 예외 이야기가 더 길어졌는데, 아뭏든 이너게임을 읽기 전에도 이미 이너게임을 해오던 부분이 있었고 또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게 이너게임을 읽고 나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이너게임을 통한 성공 사례를 추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난 번 RT 가서 이너골프 이야기를 듣고 읽고 싶어졌다. 실제로 적용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래서 이너골프를 사서 읽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꽤 도움이 되었다. 딱히 일의 이너게임보다 도움이 된 건 아닌데 되새기는데 도움을 줬던 것 같다. 그래서 이너게임도 다시 한 번 읽고 이번엔 무언가 다른 곳에 직접 적용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당구가 떠올랐다. 내가 경험한 스포츠 중에 유일하게 이너게임을 하지 못했던 종목. 다행히 지섭이는 당구를 좀 친댄다. 120이래니까 어쨋든 30인 나보다는 훨씬 잘 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분도 꿀꿀하고 해서 당구를 치러 가보기로 했다.

당구에는 이너게임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일단은 별 생각 없이 self1을 배제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좀 달랐다. 예전에는 누가 길 가르쳐주면 괜히 그리로 치기 싫었는데 지섭이한테 미리 그런 점을 말하고 시작해서 그런 부담 없이 내 맘대로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랐다. 그래서인지 첫 포인트를 지섭이가 아니라 내가 먹었다. 그것도 쓰리쿠션으로. 이걸 보고 지섭이가 나 사기 다마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_- 사실 나도 믿기 어려웠는데 그 이후로도 술술 풀려서 10분도 안되서 30을 클리어, 이겼다.

그러고 나니 확실히 이제 30은 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사실 내가 당구를 두번째 쳤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다. 대학 면접 보러 서울 올라왔을 때 홍동이랑 같이 쳤는데 그 때는 둘다 초보라 부담 없이 30 놓고 쳤는데 그 때도 한 10분 만에 내가 이겼고 그래서 50으로 올렸다. 그러자 다음 판에 홍동도 10분 안되서 30을 먹어서 둘다 50을 놓고 쳤다. 근데 문제는 이 때, 30을 금방 먹어서 자신감에 충만했지만 둘다 50을 놓고 치자 없던 부담감이 생겼는지, 자신감이 지나쳤는지 1시간이 넘도록 게임이 안 끝났다. 그래서 사실 바로 50으로 올리는 게 약간 걱정이 되었었다. 하지만 지섭이한테 미안한 감도 있고 이너게임을 실험하는데 오히려 제약조건을 주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에 50으로 올렸다.

그러고 다시 게임 시작. 아까보다는 좀 더딘 느낌이 들었다. 지섭이는 이제 몸이 풀렸는지 조금씩 실력이 나오는데 난 아까보다 페이스가 떨어졌다.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담 없이 치기는 하는데 내가 길을 모르다보니 공 하나 칠 때마다 길을 보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러다보니 지섭이한테 미안한 느낌도 들고 기분도 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중할 다른 대상을 생각했다. 내가 당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은 무엇일까. 어차피 길을 제대로 계산해 내는 즐거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계산한 게 맞든 아니든 제대로 치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두껍게 맞으면 얼마나 경로가 바뀌는지, 얼마나 스핀을 주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감이 없다보니 길이란 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공을 치는 느낌에 집중하기로 했다. 길도 대강 보고 각도를 대략 잡은 다음엔 목표한 빨간공은 보지 않고 치려는 흰공, 그 중에서도 치려는 지점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공에 맞을 때 큐대의 느낌을 느끼려고 했다. 그러자 삑사리가 사라졌고 공 맞는 느낌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좀 맞는다 싶어서 이제 관찰 대상을 늘렸다. 이번엔 흰공이 첫번째 빨간공을 맞고 나서 궤적이 어떻게 꺾이는지를 관찰했다. 두껍게 맞추면 어떻게 가는지, 얇게 맞추면 어떻게 가는지, 스핀을 주면 어떻게 되는지 등등. 그러다보니 조금씩 감이 왔고 점수도 하나씩 먹었다. 그러면서 이제 빨간공에 맞은 공이 그 다음에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했다. 여전히 칠 때는 흰공에만 집중했다. 그러니까 이제 꼭 점수를 내진 않더라도 내가 의도한 방향대로 가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사실 그 전엔 친 결과가 내가 예상한 것과 완전 다르게 어이 없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얇게 맞춰야 하는데 두껍게 맞춰야 한다고 계산하거나 스핀을 반대로 주거나 하는 등. 근데 이제 점점 예상대로 공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50점 다 따고 쿠션도 해서 또 이겼다. 두 게임에 총 게임 시간 40분 가량. 나름 괜찮은 성적이랜다. 예전에도 50 놓고 클리어한 적이 있긴 하지만 정말 힘들게 힘들게 했었고 해내도 별로 재미 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는데 이번엔 정말 재미도 있었고 공이 내 맘대로 가는 횟수가 많아지니까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아직 한 번 가지고 뭐라 말하긴 힘들지만 어쨋든 이너게임은 당구에도 먹히는 것 같다.

아직 그래도 일에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는 잘 감이 안 온다. 어쨋든 이너게임을 좀더 여러 군데에 적용을 하다보면 일에도 적용할 방법이 하나 둘씩 보이지 않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