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08-10-19

마지막 블로그 업데이트 후 두 달 정도가 지났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두 달이었다. 결혼식 준비와 사업, 양쪽 모두 일이 쏟아져 나오니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예전에 이렇게 일이 몰렸을 때보다는 나았다.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졸업프로젝트, 병특 준비, 합창단 파트장 세 가지가 몰린 적이 있었는데 그 학기에 난 두번째 학사경고를 받았고 졸업 프로젝트는 망했고 합창단 공연은 훌륭했지만 파트장으로서의 내 역할은 형편 없었다. 건진 건 병특 하나. 그래도 이번엔 여기저기 구멍이 조금씩 나긴 했지만 그럭저럭 다 해낸 것 같다.

결혼식 준비는 생각보다 일이 엄청 많았다. 결혼 준비하면서 서로 싸워서 많이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는 몇 년 동안 이야기해온 게 많아서 그런지 결혼식 자체 때문에 싸우지는 않았다. 싸우는 건 그냥 평소에 싸우는 정도? 그보다 문제는 쏟아지는 일들이었다. 결혼식 한 번 하는데 뭐 그리 해야 하는 게 많은지. 이처럼 수많은 아이템을 관리해야 하는 프로젝트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100명 짜리 프로젝트의 PM을 한다 해도 이만큼 골치 아프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서라도 두고 싶을 지경이랄까. 그러다보니 결혼식 연락 돌리는 게 너무 늦어져버려서 청첩장도 제대로 못 보냈다. 그런 거 치고는 손님들이 많이 오긴 했지만 섭섭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웨딩 플래너는 내가 기대한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난 웨딩 플래너한테 맡기면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사항들을 알아서 준비하고 스케쥴 잡고 우리가 결정해야 되는 문제가 생기면 우리한테 들고 와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고 이러이러한 선택사항이 있는데 뭐가 좋고 뭐는 어떻고 한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면서 비서처럼 해주는 줄 알았다. 근데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업체 연결해주는 것 뿐이다. 웨딩 플래너가 아니라 웨딩 브로커랄까. 웨딩 산업에서 우리 같은 고객은 주 고객층이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웨딩 산업에서 돈 잘 버는 남자와 시간 많은 여자를 고객층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돈을 대고 여자는 발품을 팔면서 상품을 고르고 챙기는 것. 웃긴 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결정할 때는 다 선화를 보는데 계산할 때가 되면 날 쳐다본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맞벌이면서 분업(?) 없는 부부들에게 맞춰진 웨딩 플래너가 있었으면 좋겠다. 잡다구레한 일들 다 처리해주고 청첩장은 언제부터 돌려야 된다, 친척들에게는 어떻게 인사해야 하고 어디까지 인사해야 하고 뭘 준비해야 하고 이런 거 다 비서처럼 챙겨줬으면 좋겠다. 다음 아이템으로 이런 거나 해볼까나.

결혼이라는 자체는 그렇게 큰 느낌이 아니었다. 한 달 가량 전부터 이미 같이 살기 시작해서 그 때 이미 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었기에 결혼 이후에는 달라진 게 없는 느낌이었다. 같이 살기 시작할 때도 이미 4년 가까이 2분 거리에서 살다보니 그렇게 엄청 색다른 느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혼 재미 어떻냐고들 많이 묻는데, 좋기는 좋지만 좋은 건 이미 이전부터 계속 좋았기 때문에 신혼이라고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1.254배 정도? ㅎㅎ 제일 좋은 건 밤이 깊어도 계속 같이 있고 아침에 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삶의 질도 극적으로 높아졌다. 집부터가 내가 10년 동안 살았던 집 중에 제일 좋은 집이다. 제일 비싸니까 당연한 건가?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분당에서 사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분당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미지가 꽤 많이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몇몇 친구들이 사는 머나먼 곳이었다. 그러다가 NHN 분당으로 가고 나서는 선화가 힘들게 멀리 출퇴근하는 곳이었고 내가 오픈마루를 들어가면서부터 분당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오픈마루 실장님이 분당 좋다는 말을 워낙 많이 해서 좀 세뇌된 것도 있고 다녀보니 동네가 괜찮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선화도 분당에 있고 해서 집도 분당에 잡고 우리 사무실도 분당에 차려서 분당 생활권으로 완전히 옮기기로 한 것.

근데 막상 집 구하러 다녀보니까 그렇게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너무 아파트 중심적인 계획도시랄까. 아파트 단지 + 상가 단지의 공식대로만 만들어져서 오히려 좀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름 환경과 생활의 편리함을 동시에 달성하는 좋은 시스템이긴 하다. 하지만 나한테는 좀 옛날 동네스러운 느낌도 필요했다. 정 붙일 데가 없는 느낌이랄까. 강북에 있는 동네들이 주는 느낌, 내가 옛날에 살던 동네가 주는 느낌, 낙성대가 주는 느낌. 정리되지 않은 건물들이 이곳 저곳에서 보였으면 했는데 분당엔 아파트 아니면 상가 건물 밖에 없다. 그냥 고만고만한 2층, 3층 건물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아파트들 돌아보면서 조금씩 실망스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미금에 아파트를 보다보니 옆에 약간이나마 아파트도 아닌, 상가 건물도 아닌 건물들이 옹기종기 있는 거리가 있었다. 여기도 딱딱 네모진 느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정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여러 가지 다른 조건도 최적이라 이 까치마을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입주하고보니 상당히 맘에 든다.

밥도 이제 저녁은 거의 직접 해서 먹는다. 선화랑 장도 같이 보고 밥도 같이 하고 설거지도 같이 한다. 같이 하니까 별로 힘들지도 않고 재밌다. 같이 늘어가는 재미도 있고. 전보다 훨씬 건강식으로 먹게 되서 그런지 화장실도 잘 가기고 컨디션도 많이 좋아졌다.

사업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사람은 그럭저럭 5명이 유지되고 있는데 팀웍이 아직 좋지 않다. 삼성이랑 일하는 것 때문에 흩어져서 일하는 것이 큰 부담이다. 삼성이랑 일해보니 이런 식으로 외주 줘서는 잘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애니콜이 예전의 명성을 많이 잃어가고 심지어 햅틱은 빙틱(빙식 햅틱)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개발하면 버그가 안 생길 수가 없지 않을까. 어쨋든 지금은 버텨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내가 팀원들에게 가끔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주는 이야기. 3M의 CEO는 13년 동안 월급을 못 받았다는. 우리는 그거에 비하면 상황이 훨씬 좋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공한 회사들도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희망적이지만 우리도 3M의 초창기처럼 어려움을 견뎌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절망적이다. 어쨋든 조금 위로는 되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정신이 없다보니 올해는 책을 많이 못 읽었다. [:독서목록]을 업데이트하고 세봤더니 올해 30권을 읽었다. 작년 내내 39권을 읽었는데 지금 페이스대로라면 작년만도 못 읽을 것 같다. 8점 이상의 좋은 책을 발견한 횟수도 엄청 줄었다. 한 편으로는 책을 더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이제는 책에서 배운 내용을 현실화시킬 때라는 생각도 든다.

간만에 쓰려니 근황보고가 되버렸다. 결혼 이야기는 할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모아서 시리즈로 블로깅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선화랑 같이 커플 블로그 만들고 블로깅이나 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