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09-11-29

닌자 어쌔신을 봤다. 사실 그닥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비의 헐리우드 데뷔작을 보고 싶었을 뿐. 물론, 난 액션 영화 좋아하지만 비가 액션을 잘할 꺼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비의 몸이야 뭐 수많은 매체에서 수도 없이 다루었으니 몸 좋은 건 알겠지만 액션이 몸 좋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당장 이소룡 같은 액션을 보여줄 리는 없겠지. 워쇼스키 형제의 능력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처음부터 예상을 한참 넘어서는 액션이 쏟아졌다. 검술 액션이 나오는 영화 중에는 최고로 꼽을 만하다.

이번 기회에 내가 본 칼싸움 나오는 영화 중에 재미 있게 봤던 것들을 꼽아본다면...

먼저 글래디에이터. 사실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액션 영화들은 대개 액션이 시시하다. 비중도 낮고. 아무래도 중장보병 컨셉이 많다보니 전투가 재미있을 수가 없다. 이런 틀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이 글래디에이터가 아닌가 싶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역사나 스토리보다 액션과 연출에 힘을 기울였고 검투사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서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긴장감을 형성했다. 찌르고 베는 장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장군 출신다운 전술 활용까지 선보이면서 이전까지의 비슷한 설정의 영화와 차원이 다른 액션을 보여주었다.

이런 글래디에이터의 액션이 유럽풍의 무거운 싸움이란 한계 내에서 극한을 보여줬다면 트로이는 그 한계를 벗어던졌다. 가벼운 갑옷과 방패, 그리고 점프 액션으로 현대적인(?) 액션을 고대 그리스의 전투에서 구현했다. 처음에는 점프하면서 거인을 쓰러뜨릴 때 경망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아킬레스의 점프는 결코 경망스러운 느낌이 아니었다. 이거 헥토르 위험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거기에 브래드 피트의 몸에서 흐르는 육체미도 내가 턱걸이를 다시 시작한 계기를 제공해주었다-_-

육체미를 강조한 액션의 극은 아마 300일 것이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육체를 너무나 강인한 느낌이 들게 잘 묘사했고 트로이나 글래디에이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투와 전쟁의 중간 쯤 되는 느낌의 액션감을 잘 살렸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왔지만 죽는 사람보다 죽이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진 연출 덕분에 잔인한 느낌은 크지 않고 스파르타 전사들만 부각되었다.

화려하기로는 스타워즈의 광선검도 화려하고 이슈도 탔지만 사실 검술 액션의 느낌이 아니어서 별로 쳐주고 싶지는 않다. 반지의 제왕도 아라곤 외에는 별반 칼 제대로 쓴다는 느낌이 아니었고 판타지 설정이 없었다면 액션은 높은 점수를 못 받았을 것이다.

유럽식에 비해 중국식은 무협의 느낌이 가미되서 훨씬 화려하다. 칼도 훨씬 가벼운 칼이고 갑옷도, 방패도 없다. 와호장룡에서 두 여인의 대결이 아마 최고로 꼽을 만한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화려하고 빠른 액션인데도 긴장감은 좀 덜하다. 정작 베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다 막아내기 때문에 잘못하면 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죽는 것들도 열심히 싸우다 죽는 게 아니고 싸울 꺼 다 싸워놓고 어이 없게 죽는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300이 더 낫다.

반면 킬빌은 그 잔혹함의 인상이 강렬하다. 거침없이 베어버리는 액션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영화다. 여주인공의 칼솜씨가 뭔가 매끄럽지 않은 듯 하면서도 위력적으로 느껴진다. 일본 스타일의 칼싸움이다. 잘려진 팔다리들이 널부러진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나도 이런 장면이 상영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쨋든 혼자서 조직 전체를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검술은 인정.

닌자 어쌔신은 이런 킬빌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보면 된다. 킬빌보다 조금 더 잔인한데, 무시무시한 느낌은 훨씬 크다. 정말 까닥 잘못하면 순식간에 죽을 것 같다. 총이라는 무기가 이렇게 허약한 것인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킬빌은 훤한 대낮에 싸우는 장면이 많아서 잔인함은 부각되지만 무서운 느낌은 덜한데 닌자 어쌔신은 어두운 실내에서 순식간에 팔다리가 날아가니까 그 공포감이 대단하다. 칼솜씨도 기대를 훨씬 넘어섰다. 비가 이렇게까지 무술을 잘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장면도 간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닌자 떼의 습격이다. 닌자는 원래 하나 아니면 둘이 움직인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많은 숫자로 들키지 않고 움직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십 명씩 동원하는 것 자체가 좀 오바였고, 그 많은 숫자와 라이조 혼자가 제대로 싸우는 것도 좀 무리한 설정이었다. 또 하나는 재생 인술(?)이다. 나루토에서도 츠나데나 카부토 정도나 보여주는 재생 인술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쓰는 것은 액션의 사실감을 강조한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좀더 다양한 닌자 무기가 제대로 등장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살짝.

어쨋든, 액션으로만 따지만 칼싸움 나오는 영화 중에는 역대 최고인 듯 하다. 킬빌과 300, 와호장룡의 장점을 모은 듯한 액션이다. 킬빌을 재밌게 봤다면 닌자 어쌔신에 감탄할 것이다. 하지만 킬빌 보면서 뭐야? 하는 반응을 보였거나,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안 보는 게 좋을 듯.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난 것은 디워. 디워가 이 정도의 연출력을 갖췄다면 스토리고 뭐고 다 없어도 재미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