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13-06-24

5년 전 지섭이랑 처음 창업했을 때였다. 그 때는 딱히 외주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소개가 들어와서 외주 일거리 관련 미팅을 했었다. 간단한 프로젝트 같아서 2명이서 2개월 하는 비용으로 당시 단가대로 견적을 내줬다. 그랬더니 그 고객은 너무 비싸다면서 한참 가격 협상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는 두어 달 후에 우리가 제시한 금액의 절반 정도로 해준다는 개발팀을 구했다.

그리고는 1년 후 어쩌다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났다. 사실 난 그 아이템 잘 안될 꺼라고 봤기 때문에, 오픈했다가 지금은 다시 서비스 접은 상태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아직 서비스 런칭조차 못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상태를 보여주는데, 정말 이게 1년 동안 개발한 수준인가 싶었다. 솔직히 고소한 기분이 들었고, 이쯤되면 당연히 그 때 우리한테 돈 제대로 주고 일 맡길 걸 하는 후회를 하겠지 싶었다.

근데 왠걸, 이 고객은 우리에게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해왔다. 원래 예산 잡았던 것 중 그 개발팀에게 쓰고 남은 돈을 우리한테 줄 테니 소스코드 받아서 마무리 해달라는 것. 그 실패를 겪고 나서도 배운 게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거절했고, 결국 그 고객은 끝내 서비스를 런칭해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웹 오피스 일을 의뢰했는데 지섭이네 회사랑 우리랑 합쳐서 6개월에 구글 독스의 80% 수준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비용 견적을 냈는데, 무려 3분의 1을 깎자고 나왔다. 물론 거절했고, 1년 쯤 지나서 문서편집은 빠진 채 뷰어만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일을 5년 내내 한 스무 건은 겪은 것 같다.

물론, 돈이 정말 모자랐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돈이 모자라서 사업을 중단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는데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근데, 그 고객들의 태도는 자기들이 돈이 모자라서 못 주겠다는 게 아니었다. 왜 니들에게 그렇게 큰 돈을 줘야 하는가였다. 태도만 달랐어도 다시 생각해봤을지 모른다.

여기서 더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 무어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작정 믿으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지. 그래서, 간혹 중간 단계를 제시하곤 한다. 1~2주만 계약해서 일을 시켜보고 진척상황을 본 후 다음 계약을 진행하자. 난 사실 이게 매우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걸 받아들이는 고객은 없었다. 만약 1~2주 해보고 아니라는 판단이 설 경우 그 1~2주 투자한 비용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일을 하도 많이 겪다보니 요즘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주어진 기간에 당신이 요구하는 소프트웨어를 완성해줄 수 있으니까" "만약 더 싸게 해낼 수 있는 개발팀을 알고 있으면 그냥 거기 맡기세요." 이 말이 꼭 그런 개발팀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은 아닌데 이 말을 해주면 그 때부터 "저렴한 개발팀"을 찾기 시작한다. Good luck. 뭐, 사실 적은 돈으로 완료해주는 호구 개발자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행운이 따른다면 찾을 수 있겠지.

그래도, 이런 일들이 많이 반복되면서 업계가 좀 학습을 했는지, 요즘은 사람들이 단가 개념을 알고 프로젝트를 제안해와서 협상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너 왜 그렇게 비싸" 하는 사람이 없는 것만도 감지덕지. 아니 그런 사람 있긴 한데, 적어도 입밖으로 내진 않더라.

개발자 시장(?)이 레몬마켓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비싸게 준다고 오렌지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싸게 주면 거의 입도 대지 못할 만큼 신 레몬을 사게 되니까 그걸 피해야 하는 것 뿐이지.

예전에 권일이가 나한테 해준 조언이 있다. 아니, 권일이는 정한이한테 배웠다고 그랬던가? 무언가 물건을 살 때의 조언인데, "잘 모르면 돈을 써라"는 것. 좋은 구매를 하려면 그 물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보를 습득할 시간은 없고, 좋은 물건을 사고 싶다면 다른 대안은 돈을 더 많이 쓰는 것. 물론 이건 그 반대도 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을 들여서 공부를 하라"도 된다. 그러니까 자동차 사려고 그 많은 정보를 뒤적거렸지.

비슷한 이야기로, "시간을 절약하려면 돈을 써라"도 있다. 물론 이것 역시 "돈을 절약하려면 시간을 써라"도 된다.

뭔가 스토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사실 별달리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은 아닌 것 같다. 나한테 일 줄 때는 돈 좀 쓰라는 얘기 밖에 안되는 것 같잖아. 그래서, 다음 번에는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최저 수준의 개발자를 구별해내는 법, 그리 뛰어나지 않은 개발팀으로 프로젝트를 완료해내는 법, 충분한 예산이 있을 때 그 돈으로 제대로 레버리지를 하는 법, 스타트업이 적은 비용으로 뛰어난 개발자를 구하는 법 등으로 포스팅을 해보려고 한다.

근데 뭔가 이 비슷한 내용을 블로깅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 건, 이 데자뷰 같은 일이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일까? 내 블로그는 검색이 안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