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설날 요리 후기

정말 오랜 만에 설날을 집에서 보냈다. 그동안은 매년 명절마다 해운대에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잡고 가족들이 모여서 2박 3일을 놀았다. 부산에 집을 놔두고 굳이 숙소를 잡은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일단 총 여덟 명이 자기에는 집이 좁기도 했고, 또 집에서 설날을 보내면 필연적으로 엄마가 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고, 우리 집은 가부장제를 떨쳐가는 중이긴 하나, 선화도 며느라기적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며느라기의 댓글들을 보면 이런 암묵적인 문화를 아들이자 남편인 무구영이 나서서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일 놈 취급을 당하고 있지만, 암묵적인 문화를 깨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명시적으로 시키는 것도 아니고, 안한다고 누가 욕하는 것도 아니지만 엄마에게도 선화에게도 심리적인 압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전략을 썼다. 일단은 장소를 바꾼다. 장소가 집이 아니고 여행지의 숙소라면 거기서 밥을 해야 할 1차 의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사먹는 선택지를 우위에 올릴 수 있다. 집안 대청소를 할 필요도 없다. 설거지를 내가 하는 것도 그닥 어색한 상황이 아니게 된다. 모두 같은 출발선상에 서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래도 반만 성공했다. 그래도 아들 먹이겠다는 일념에 엄마는 매번 명절 때마다 음식을 해오셨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내 말에 안한다고 하면서도 해오셨다. 그나마 매년 조금씩 분량이 줄기는 했지만.

그러다가 이번엔 다른 핑계가 생겼다. 우리가 이사를 했으니 집들이를 하는 게 좋겠다. 아예 부산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놀러오면 이번엔 할래야 할 수가 없겠지. 이제 우리가 호스트가 되고 부산 식구들이 손님이 되는 거다. 명절 대이동의 흐름과 반대가 되니까 부산 식구들도 비교적(?) 편하게 KTX 타고 올 수 있고, 명절 준비할 필요 없고, 나는 2~30시간 운전 이런 거 안해도 되니 우리가 명절 준비하는 것도 부담이 없다. 게다가 나는 명절이라고 명절 음식 제대로 할 생각 따윈 없으니까 사실 보통 주말보다 손이 크게 많이 가는 것도 아니다. 선화는 약간 부담스러워했지만 2~30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것에 비하면 훨씬 부담이 적은 데다가 요리를 내가 전담하겠다는 말에 오케이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콩나물국

첫날 저녁은 스테이크와 콩나물국(응?)을 생각했다. 본래는 일반적인 형태의 스테이크와 가니시를 준비할 계획이었으나, 엄마는 밥을 먹어야 하는 스타일인지라 한국적인 스테이크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국을 하나 준비하려 했는데, 된장이 다 떨어져서 된장찌개는 못했고, 미역국은 생각났었는데 당일날 까먹어버렸고(ㅠㅠ) 그래서 남은 게 콩나물국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콩나물국이라기보다 소고기무국과 비슷한 느낌의 콩나물국(부산에선 이걸 육개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인데, 애들이 먹을 수 있도록 매운 양념만 뺀 걸 구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이 안되는 구상이었다. 매운 양념을 빼면 그 육개장보다는 그냥 콩나물국에 가까워진다. 게다가 무를 넣는 것을 깜빡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로 뭔가 맛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콩나물국이 탄생했다. 아직 한국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응용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나마 엄마는 먹을 만하다고 해주었지만, 선화는 한 모금 먹고 비웃음을 내뱉었다;; 뭐, 나는 고기가 많이 들어갔으니 고기 맛으로 먹을 만은 했다.

스테이크

스테이크는 야심차게 코스트코 프라임등급 척아이롤과 이마트 트레이더스 초이스등급 살치살을 두 개 준비했다. 원래 코스트코 척아이롤이 가성비 끝판왕이라서(1.7kg에 3만5천원 정도) 이것만 하려다가 트레이더스 간 김에 조금 더 고급(?) 고기를 사려고 구이용으로 좀더 맛있다는 평가를 받는 살치살 부위를 샀다. 등급은 초이스라 마블링도 더 적지만 두껍기도 하고 부드러운 부위라 스테이크용 중에서는 가성비가 좋은 편이다. 그래서 살치살은 정확하게 미디엄으로 구워냈고, 척아이롤은 좀더 얇아서 미디엄 던으로 구웠다. 근데, 엄마한테 아직 빨간 부분이 남은 고기는 그닥 환영받지 못했다. 몇 번이나 직접 다시 구워올까 하고 물을 정도. 장모님도 내가 구운 고기에 붉은 기가 조금만 남아 있으면 안 드신다. 그니까 그게 핏물이 아니고 미오글로빈이라구요.

뭐, 엄마가 먹기엔 별로였지만, 내가 먹기엔 상당히 좋았다. 약간 식은 상태에서도 꽤 맛있었다. 고기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서 미디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미디엄 던과 미디엄 레어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미디엄 레어부분도 상당히 맛있었다. 레스팅도 정석대로 5분 정도 기다렸더니 정말 썰 때도 육즙이 새지 정도가 달랐다. 레스팅 여부에 따라 육즙이 어떻게 빠지는지 실험한 영상보고 충격 받았었는데, 정말 차이가 체감이 되었다. 이것도 과학적 원리가 궁금해진다.

스테이크에 대해 여러 가지 썰들이 많지만, 내가 얻은 최근 지식은 이렇다. 굽기 전에 하는 대부분의 마리네이드는 소금 이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일단 고기 안으로 스며들 수 있는 것이 소금 뿐이라 다른 재료들은 겉면의 풍미를 내는 것 뿐이다. 고든 램지가 버터를 고기에 계속 끼엊는 것도 쓸데 없는 짓으로 보인다. 어차피 스며드는 게 아니라 표면에 풍미를 내는 거라면 한 번만 끼얹어도 결과는 동일할 것이다. 미리 올리브유를 바르는 것도 연육작용은 기대할 수 없고 약간의 풍미를 더해주는 건데 어차피 올리브유로 굽는다면 아무 차이가 없다. 후추도 열을 받으면 향이 대부분 날아가기 때문에 괜히 더 타기만 할 뿐이라고 한다. 굳이 넣고 싶으면 다 익을 때쯤 넣는 게 낫다.

고기를 익히는 것도 한국 사람들은 굳이 골고루 잘 익히기 위해 별의별 수를 다 쓰지만, 결국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라는 미디엄은 겉면이 살짝 타고 안이 살짝 덜 익은, 한 마디로 말해서 대충 구웠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니까, 소금 대충 뿌리고 대충 구우면 제일 맛있는 스테이크가 된다는 얘기다. 스테이크의 역사가 돌고 돌면서 과학을 거쳐 결국 옛날에 대충 뭉텅이 고기 구워먹던 시절이 제일 좋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니까,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테이크라고 부담가질 필요 없이 마트에서 대충 두꺼운 고기 사다가 소금 대충 뿌리고 대충 구워 먹으면 된다.

그러나, 사실 식구들의 반응은 이렇게 잘 구운 살치살 미디엄 스테이크도 아닌, 척아이롤 미디엄 던도 아닌, 에어 프라이어로 더 힘 안들이고 대충 구운 웰던 척아이롤에 호의적이었다. 팬으로 굽는 것보다 더 골고루 익으면서도 겉면에 약간의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난다. 게다가 기름기가 많아서 많이 익혀도 맛있다. 엄마는 한우보다 맛있다고 했을 정도. 정녕 이게 최선이란 말인가.

물론 나도 이제 살치살은 다시 안 살 것 같다. 설령 스테이크 미디엄으로 먹기에 괜찮다고 해도 척아이롤의 압도적인 가성비를 넘어설 수는 없다. 식구들도 덜 익힌(!) 고기 그닥 안 좋아하는데 굳이 스테이크 해먹기보다는 구이와 스테이크의 중간쯤으로 해먹는 게 나은 것 같다.

어른 넷에 아이 둘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다보니 스테이크도 여러 장 구워야 했는데 작전을 잘못 짰다. 일단 에어프라이어에 두 장 넣어서 돌려놓고 나서 팬에서 구워야 했는데, 에어 프라이어는 쓸데 없는 생색내기용 명절 음식인 냉동전을 익히는데 낭비했다. 뭐, 그것도 그런데로 맛있긴 했지만, 차라리 그건 기름에 빨리 구워내는 게 나았을 것이다. 단지 평소보다 두 배 정도 양을 요리한 것 뿐인데도 이렇게 시간이 안 들어 맞는데 레스토랑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떡국

사실 떡국은 예전부터 내가 꽤 잘 끓이던 음식이다. 떡국에도 스테이크 못지 않게 통용되는 미신이 하나 있는데, 그건 떡 미리 불려놓기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데 사실 별 의미 없다. 그냥 고기를 미리 마늘과 참기름에 볶고 나서 물 붓고 끓으면 떡 넣고 파 넣고 계란 넣으면 끝이다. 근데, 전날의 콩나물국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떡국은 응용 따위 하지 말고 레시피 하나 찾아서 하기로 했다. 마침 명절 특수(?)로 백선생의 레시피가 떴다. 포인트는 액젓을 넣는 것. 근데 막상 아침에 요리를 하려고 보니 없는 게 많았다. 마늘과 국간장(!)이 없었던 것. 그래서 마늘 대신 파를 좀더 넣었고 국간장 대신 국시장국 가쓰오부시 버전을 조금 넣고 대신 액젓을 좀더 많이 넣었다. 고기(역시 코스트코 척아이롤)빨로 국물이 어느 정도 우러나고 걱정했던 것보다 맛있긴 했지만, 액젓 맛이 강하고 감칠맛이 과하다는 느낌이 좀 들었다. 액젓은 안 쓰는 게 좀더 담백한 것 같다. 그래도 식구들의 반응은 좋았다. 이거 하나는 성공. 그래도 국간장과 마늘은 안 떨어지게 항상 준비해놔야겠다. 

계랸 지단은 시킨대로 안하고 버터로 구웠는데 역시 난 이게 더 맛있다. 근데, 백종원이 보여준 젓가락으로 뒤집기는 잘 안되서 팬 흔들어 뒤집기를 했는데 한 바퀴 반을 돌아버리는 바람에 실패. 이건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닭구이

점심 메뉴는 호떡(???)과 닭구이를 준비했다. 호떡은 예정에 없던 건데, 하영이가 갑자기 피자를 먹고 싶다고 떼를 쓰는데, 피자집들이 오늘은 오후부터 배달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햄버거 빵으로 피자 흉내나 내줄까 했는데, 선화가 호떡으로 타협을 본 모양이다. 그래서 선화가 호떡을 먼저 해서 먹는 사이에 닭 두 마리를 각각 오븐과 에어 프라이어로 구웠다. 근데, 원래는 찜닭을 하려고 샀던 닭이라 다 잘라져 있는 건데, 이걸 오븐에 요리한 게 실수였다. 게다가, 찜닭이 귀찮아서 오븐 구이를 한 건데 두 개로 나누어서 하고 여러 번 뒤집고 하다보니 이것도 손이 적지 않게 갔다. 그냥 큰 냄비에 대충 찜닭으로 끓여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결과물은 한 마디로 말하면 대 실패였다. 닭을 이렇게 맛 없게 요리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 잘라져 있는 걸 오븐에 굽다보니 기름과 수분이 다 빠져 버려서 푸석푸석했다. 오븐으로 하려면 통째로 넣고 한참 동안 익히는 게 답인 것 같다. 닭도리탕 용으로 닭구이를 하면 절대 안된다. 닭봉과는 다르다.

그래서 보완하기 위해 소프 영상에서 배운 레몬마요 소스를 준비했다. 여기 찍어먹으니까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그래도 닭이니까 소금도 찍어먹고 레몬마요도 먹으면서 다들 잘 먹었긴 했다. 요리는 대 실패지만 닭이니까 용서... 뭐 그런 느낌이랄까.

네 줄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