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09-05-16


Youngrok Pak at 12 years, 10 months ago.

어제는 출근하기 귀찮아서 그냥 집에서 일했다. 일하면서 어쩌다 유튜브에 걸렸다.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베토벤 바이러스의 들리나요가 생각났다. 태연으로 검색하니까 많이 나온다. 하나씩 듣는데 정말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 나 정말 요즘 아무 슬픈 일도 없는데 들리나요, 만약에를 이어서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얼마 전 불후의 명곡에서 양희은 노래 부르는 거 보면서 역시 연륜이 쌓이니까 노래의 호소력이 다르다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양희은의 노래에서 느꼈던 그런 느낌을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태연에게서 느끼는 것이다. 계속 찾아서 듣다보니 강인이랑 하는 라디오 프로에서 애인 있어요를 부르는데 너무 잘 부르니까 강인이 놀랍다는 말투로, "태연이 이제 스무살이예요"라는 말을 한다. 강인도 아마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문득 이창호 생각이 났다.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를 재패하기 시작할 때, 그 때까지만 해도 연륜이 쌓여야 바둑이 깊어진다는 생각이 강했다. 실제로 당시 바둑 최강국인 일본의 주요 강자들은 40대가 넘어서야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대의 이창호가 세계의 강자들을 연파하고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바둑계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바둑의 깊이가 과연 어린 아이가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http://baduk.ohmynews.com/Column/CBoard/view.asp?seq=448&pagec=&gubun=C004 이 글을 보면 어떤 느낌인지 와 닿으려나.

그런 느낌을 태연을 보면서 일부 받았다. "스무 살이 이렇게 노래를 잘해도 되는 거야?" 하는 느낌. 하지만, 바둑인들이 착각했던 것처럼 나이 어린 이창호가 경지에 올랐다고 바둑의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니고 스무 살 짜리가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부른다고 노래란 것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웃라이어가 되기에 필요한 deliberate practice 1만 시간을 쌓았던 것 뿐. 태연이 노래를 부르는 표정을 보면 정말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그런 열정이 1만 시간이 쌓이면 저렇게 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내가 프로그래밍을 접한 것은 10살 때, 스무 살까지 10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내 스무 살 때의 프로그래밍 실력은 형편 없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에야 겨우 expert에 접근해 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도 프로그래밍을 참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태연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뭔가 억울한 느낌도 좀 든다. 더 파이팅의 일보가 첫번째 타이틀 매치에서 지고 나서 받은 그런 느낌이랄까. 일보는 자기가 권투를 좋아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타이틀 매치 비디오를 찬찬히 보면서 자기가 챔피언에게 기술이나 파워에서 진 것이 아니라 권투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졌다는 것을 깨닫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뭐 난 그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살짝 분한 느낌이다.

참 노래 하나 가지고 별 생각을 다한다. 어쨋든 좋은 노래를 들려준 태연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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