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_어떻게_정의할_것인가


Youngrok Pak at 11 years, 1 month ago.

 

나우누리 SCCR에서 있었던 논쟁으로 인해 교지 관악에서 제의를 받아 기고한 글. 당시 논쟁 상대자의 글도 함께 실렸는데, 논쟁 당시에는 이긴 논쟁이었지만 교지에 올릴 때는 상대자가 훨씬 보강된 논리를 준비해왔었던 기억이. 어쨋든 현재 널리 적용되고 있는 성폭력 관련 법률이나 학칙은 이 당시의 내 논리에 더 가까와져 있다.


최근 몇 년간 학내 여성운동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성폭력 학칙 제정에 대한 논의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관악 전체에 확산되었고 구체적인 학칙안이 나오고 그게 공식적으로 학칙으로 인정되는 단계에 와 있죠?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다른 대학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현재 여성 운동에서 '성폭력'이란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조금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 현재 '성폭력 학칙안'이라고 나와있는 것을 비롯해 여성 운동권에서 주장하고 있는 성폭력의 개념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성폭력을 새롭게 정의해보고자 합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전 이제까지 어떤 종류의 여성 운동에도 참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성 운동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고 글 중간 중간에 저의 무식함이 많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저 자신도 남자인만큼 남성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 마음대로 몇 가지 용어를 재정의해서 사용할 것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합니다.

먼저, 전 제가 생각하는 성폭력을 말하기 전에 자유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들어가고자 합니다. 웬 뚱딴지 같이 갑자기 자유냐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제가 성폭력을 이해하는 사고의 구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성폭력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자유의 정의를 전제하게 될 겁니다. 먼저 사람의 행동이라는 전체집합을 자유집합과 자유의 여집합, 두 부분으로 나누어봅시다. 자유집합은 말 그대로 여기까지는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의 집합이고 자유의 여집합은 '자유'라고 볼 수 없는 행동들의 집합이죠. 따라서, 어떤 행동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먼저 그것이 자유집합에 속하는지 자유의 여집합에 속하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유집합에 속한다면 성폭력이 아닌 것이고 자유의 여집합에 속하면서 성적인 행동이라면 성폭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자유는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교과서적 정의에 따르면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이 이외의 다른 방식의 정의를 교과서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쾌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전 이러한 자유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무조건 자유가 아닌 게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대의 시설노조 파업. 그것은 많은 서울대생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만드는 피해를 주었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많은 사람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죠.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시설노조의 행동은 '남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설노조의 행동은 자유집합에 속할까요? 자유 여집합에 속할까요? 어떤 벤처기업이 크게 성공하여 원래 그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대기업이 매출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벤처기업은 대기업에 손해를 끼쳤으니 잘못한 걸까요? 성폭력과 좀 유사한 예를 봅시다. '요즘 젊은이들'의 옷차림에 불만이 많은 한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머리를 울긋불긋 염색하고 찢어진 청바지에 쫄티를 입은 청소년을 만나서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청소년은 그 할아버지에게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니까 그러한 차림으로 거리를 나돌아다녀서는 안되는 걸까요?

저런 것들이 자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저는 자유를 재정의하고 싶습니다. 제가 정의하는 자유는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합의라는 것은 그 합의의 대상자 모두가 직접적이든 암묵적이든 동의를 한 것을 말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경우도 많기에 '이성적인'이라는 단서를 붙인 거고, 핵심은 '사회적 합의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기본적으로 사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당사자간 관계에서의 합의를 말하는 것일수도 있고 그 둘을 모두 고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관습적인 합의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습적인 사회적 합의라도 그것의 합리성이 보장된 경우에만 자유의 판단 근거로 삼을 수 있겠죠.

상당히 애매모하한 듯 하지만 자유라는 것 자체가 명확하게 선을 긋기 힘든, 이런 상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따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정의하는 자유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고 그 합의의 합리성이 보장된다면 그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더라도 그것은 자유다.'라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앞으로 성폭력에 대한 논의는 모두 이 자유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성폭력에 대한 제 정의를 보기 전에 먼저 여성 운동에서 주장하는 성폭력의 정의로서 '성폭력 학칙안'을 한 번 봅시다. 성폭력 학칙안에 따르면 성폭력은 법률로 정의되는 것을 말하는 거고 대신 성희롱에 대한 항목 중에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성적행동과 요구 등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인 행위를 통하여 개인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학칙안에서 지칭하는 법률이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고 처벌 규정을 보면 성희롱과 성폭력을 특별히 분리해놓지 않고 대부분 성희롱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상적으로 성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이 학칙안에서의 성폭력과 성희롱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봐도 될 듯 합니다. 성적 자율권이 침해된다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는 성적 행동을 당하거나 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저 정의대로라면 '피해자가 불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성적 행동 및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행위는 성폭력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겠죠. 이것이 여성 운동에서 말하는 '피해자 중심주의'인 듯 합니다. 즉, 피해자가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폭력이 되버리는 거죠.

이런 현재의 성폭력 개념은 앞서 제가 정의한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많습니다. 앞서 말한 기존의 자유의 정의에서 생기는 것과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많죠. 그래서 저는 앞의 자유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를 깨뜨리는 성적 행동'을 성폭력으로 정의하자고 제안합니다. 몇 가지 적용 사례를 통해 학칙안 상의 성폭력과 비교해보겠습니다.

  • 사례 1. 여학생들과의 스킨쉽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한 남자 선배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어깨동무를 한다든지, 손을 잡는다든지 등의 가벼운 스킨쉽이죠. 그런데, 몇몇 여학생들이 이런 스킨쉽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스킨쉽이란 것은 집단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은 경우일 수도 있고, 대단한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남자 선배의 행동은 성폭력일까요?
    • 학칙안 상의 정의에 따르면 여자 후배들의 성적 자율권이 침해되었음이 명백하므로 성폭력이 되겠죠? 그러나, 이것을 성폭력이라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제 정의에 따라 판단해본다면, 먼저 그 남자 선배의 행동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는 성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집단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 문제는 당사자, 그리고 그 주변 사회에서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는지를 보아야겠죠. 그런데, 이 경우 여자 후배들이 그 남자 선배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한 바가 없다면 역시 합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선배는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를 깨뜨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폭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례 2. A(여)와 B(남)가 있는데 둘이 CC라고 합시다. 그런데 아직 서로간의 성적인 접촉은 대단한 수준이 아닙니다. 점차 진전되어가는 단계죠. 그런데, 어느날 B가 술이 많이 취한 상태에서 갑자기 A에게 이제까지의 발전 속도를 넘어서는 성적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A는 '이거 다음엔 이거일 꺼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기습으로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고 그 남자 친구에게 실망해서 다음날 아침 성폭력 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이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할까요?
    • 이 경우도 학칙안 상의 정의에 따르면 A가 성적 자율권을 침해당한 것이 명백하므로 B는 성폭력을 저지른 것이 되겠죠. 그러나 이것이 합리적인 판단일까요? 저의 정의에 따르면 이것 역시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B의 행동이 자유집합에 속하는지 자유여집합에 속하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성폭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A가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B가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이 때는 B의 행동은 상호간의 합의를 깨뜨린 것이 명백합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성폭력으로 처벌대상이 되어야합니다. A가 이런 거부 의사를 전달하지 않았다면 B의 행동은 비록 A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했더라도 성폭력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례 3. A는 아주 유머가 풍부한 사람으로 종종 주변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머에는 늘 성적인 비유가 포함되곤 하는데 대부분의 여성들도 그 유머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폭소를 터트렸고요. 그런데 어느 날, B라는 여자가 거기에 기분이 상했고 그래서 바로 성폭력으로 제소했습니다. 어떻게 판단해야할까요?
    • 전 이것 역시 앞의 두 경와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의 제기가 있어야합니다. 만약에 단지 A가 B에게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이 성폭력으로 규정되어버린다면, A는 성적인 비유를 사용하는 농담은 전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적인 비유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성폭력이라는 말도 들은 바 있는데 남녀 모두 같이 공감하는데도 단지 성적인 비유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성폭력으로 규정되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불합리한 일입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든지 먼저 일단 해버리면 그 상황에서 합의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처벌할 수 없으니 일단 저질러놓고 보면 되지 않느냐.'하고요. 그런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 사례 4. 어떤 술 취한 남자가 지나가던 여자에게 성추행을 했습니다. 이건 학칙안 상의 기준으로 분명한 성폭력입니다. 제가 정의한 기준으로는 어떨까요? 이런 행동은 이미 사회 전체에 성폭력이 맞다는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폭력이 맞습니다. 사례 5. 종종 해방터 자보에 성폭력 가해자의 사과문이 공개되곤 하는데 보통 사건 유형이 비슷하더군요. 남녀 모두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 방에서 밤을 보내다가 남자가 성충동을 이기지 못해 성추행을 저지르는 식이죠. 일단 이런 경우는 그 행동의 정도와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서 성폭력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피해자측이 거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성적인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어 있으므로 성폭력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죠.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호간의 합의가 깨졌느냐 아니냐가 그 행동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는 피해자의 사전 '가부 의사 표시'가 대단히 중요하며 표시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하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피해자에게 불쾌감을 주었더라도 성폭력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 '피해자 중심주의'적 시각에서는 '동의 의사 표시'가 기준이 됩니다. 즉, 합의가 먼저 보장된 행동, 즉 자유집합에 속하는 것이 명백한 행동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겠죠. 제가 굳이 자유를 재정의하고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한 이유는 이러한 '피해자 중심주의'가 잘못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실적으로 '동의 의사 표시'를 사전 합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매번 '나 키스해도 되'하고 물어보고 키스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따라서 '거부 의사 표시'를 기준으로 삽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입니다. 거부 의사 표시야말로 합의가 깨어졌음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법적으로도 강간과 화간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피해자의 저항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무시하게 될 위험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판단 근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그나마 이것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간에 충분한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선을 넘는 행위는 성폭력으로 규정하여 처벌할 수 없고, 합의가 깨어진 게 명백한 상황, 혹은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이 차단된 상황에서만 성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속칭 연애박사들의 연애론을 들어보면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여자의 거부의 표현에서 그것이 진짜로 거부하는 표현인지 표현만 그렇고 마음은 동의하고 있는지를 잘 판단하라.' 불행히도 많은 남자들은 이런 판단 능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경우 여자의 입장에서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가 진짜 거부라는 것이 전달되도록 충분한 의사 표시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정말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다.'라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느낀다면'하는 생각이 피해자 중심적인 사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피해자만(!)을 고려하는 사고입니다. 당시의 상황이 어떤지, 당사자가 어떤 관계인지를 도외시한 채 성폭력을 일방적으로 규정해서 가해자를 처벌하는 일은 가해자를 또다른 '피해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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