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07-03-04


Youngrok Pak at 5 years, 6 months ago.

대재앙의 종결. 이번 MSL 결승전 홍보 문구였다. 잘 모르는 사람은 대재앙이라는 표현에 오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그의 세상이 펼쳐지는 브루드워의 스토리, MSL 6연속 저그 우승이 눈앞에 있고 김택용의 상대는 당대 최강 마재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팬들에게는 정말 가슴에 와닿는 표현이다. 마재윤의 현재 상태를 보면 공식 랭킹 1위, 12회의 5전 3선승제 경기에서 11승 1패, 2006 시즌 대 프로토스전 21승 3패 87.5%의 승률, MSL 5회 연속 결승 진출, 3회 우승, 이번 시즌 온게임넷 우승, 정말 화려하다. 이런 걸 토대로 김택용이 이길 확률을 계산하면 2.69%랜다. 3:0으로 이길 확률은 0.38%. 말도 안되는 확률 같아 보이지만 게임방송 관계자 중 저 확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그가 지배하는 세상, 김택용은 그 마재윤에 도전했고 3:0으로 대재앙을 종결시켰다.

결과가 나온 다음에 이런 글을 쓰게 되서 참 아쉽기는 하지만 난 김택용의 승리에 걸었었다. 그래서 스갤에 예언 한 마디 올릴려고 했는데 아쉽게 짤방으로 쓸 사진이 없어서 올리지 못했다 ㅠ.ㅠ 내가 김택용의 승리를 예상한 이유는 비합리적인 이유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비합리적인 이유, 스타에서 당대 최강자는 대체로 프로토스에게 무너지면서 최강자의 자리를 내줬다. 임요환은 김동수에게 3연속 우승을 저지 당하고 이후 박정석에게 또 한 번 3회 우승을 저지 당한 이후로 이윤열에게 최강자의 자리를 내줬고 이윤열은 강민에게 4연속 우승을 저지당한 후 최연성에게 자리를 내줬다. 최연성은 OSL에서 오영종에게, MSL에서 박정석에게 패한 후로 마재윤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짧으나마 최연성과 마재윤 사이를 채웠던 박성준, 박태민의 양박저그도 MSL에서 프로토스에게 2:0으로 스윕당한 후 전성기를 종료했다. 프로토스가 비록 무너뜨린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재윤을 무너뜨리는 것도 테란이기보다는 프로토스일 것 같았다.

합리적인 이유도 있다. 지난 시즌 프로리그 우승팀 Hero의 감독이 자기 팀에서 가장 강한 선수로 김택용을 꼽은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마재윤이 대프로토스전 87.5%였다면 강민의 프로토스 대 프로토스는 최근 90%였고 누구나 인정하는 프로토스전 최강자였는데 4강전에서 놀라운 경기력으로 3:0으로 완승했다는 것. 사실 프로게이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기록보다도 경기 내용에서 나타나는 포스다. 마재윤이 본좌 소리를 듣는 것은 그 기록도 이유지만 경기 내용에서 마치 테란이나 프로토스가 원래 저그를 이길 수 없게 설계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근데 김택용도 저그에게 이길 때 보면 원래 상성과 상관 없이 프로토스가 저그에게 원래 유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기에 대 강민 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을 생각하면 마재윤에게 원래 부족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경기를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마재윤의 살인적인 스케쥴이다. 이미 4강전도 이틀 연전을 치러냈고 지난 토요일에 이어 바로 결승을 맞았다. 그나마 4강전, 온게임넷 결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 경기들이 대부분 대테란전이었다는 것이다. 이윤열 역시 내내 테테전만 치르다가 결승에서 대저그전을 하게 되어서 적응이 힘들었던 것이고. 게다가 마재윤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거듭되는 대테란전이 장애가 되었음이 틀림 없다. 대테란전에서는 꼭 병력 숫자에서 압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뮤탈 1부대 남짓으로 피해 주고 러커 몇 마리로 제2멀티 방어하면서 시간 끌고 디파일러 나오면 멀티 늘려가면서 방어하는 게 마재윤 스타일이다. 테란의 공격 병력을 궤멸시킬 필요도 없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피해만 입지 않으면 된다. 그러다가 멀티 수 차이 나면 그 때 힘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근데 대프로토스전에는 이게 안된다. 러커냐 뮤탈이냐 히드라냐의 가위바위보 싸움을 강요해서 큰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힘으로 이기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대테란전에 익숙해진 마재윤이 일주일만에 다시 물량전 감각을 회복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김택용의 철저한 정찰로 가위바위보 싸움을 강요할 수도 없게 되버렸다. 결국 물량전 감각이 떨어진 마재윤은 병력이 모여 있어야 하는 타이밍에 병력이 없었던 데다 대테란전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의 견제에 휘둘려서 패한 것이다.

이윤열도 양대리그 결승에 동시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이윤열은 프로리그 결승, 팀리그 결승까지 올라서 네 개의 결승을 소화해야 했었고 결국 양대리그에서 만난 양박저그를 둘다 이길 수는 없었다. 그보다 먼 과거에는 임요환도, 이윤열도 양대리그 동시 제패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경기 수도 훨씬 적었고 상대적인 기량 차이가 컸었기 때문에 논외. 지금은 연습량이 중요하다. 마재윤이 이윤열을 이겼을 때도 정말 연습 많이 했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 이윤열이 테테전만 하다가 일주일 만에 테저전을 소화할 수 없었듯 마재윤도 그랬던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마재윤의 스케쥴이 좀 나아져도 다시 마재윤 천하가 되리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체로 한 번 꺾인 기세가 다시 살아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임요환, 이윤열도 재기하는데 1년 넘게 걸렸고 최연성은 아직 1년이 안되서 그런지 재기하지 못했다. 2연속 전승 우승이라는 E-Sports 계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장재호도 그루비에게 진 이후 다시 최강자의 자리에 오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 당장 바닥을 헤맬 일은 없겠으나 마재윤 천하는 이제 끝이 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 1년 간 정말 게임 방송에 재미 있는 거리들이 줄줄이 쏟아져서 정말 재미있었다. 다른 팀들이 좀더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해도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던 T1의 프로리그 재패. 그리고 그걸 무너뜨린 Hero의 돌풍. 데쓰노트와 가을의 전설이 얽힌 이윤열과 오영종. 마재윤의 MSL 3회 재패, 5회 연속 결승 진출, 마재윤과 이윤열의 본좌 대결, 강민의 성전과 강민이 해내지 못한 타도 마재윤을 이뤄낸 김택용.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이처럼 많은 스토리들을 만들어 내면서 장수할 꺼라는 예상을 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스포츠는 역사가 길어지면 경기 내용 뿐 아니라 선수들과 팀들, 그리고 대회의 역사를 둘러싼 사연들이 스포츠를 더 풍부하게 만들고 재미 있게 해준다. 말하자면 E-Sports는 이제 캐즘을 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언제까지 갈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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