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09-02-27


Youngrok Pak at 5 years, 10 months ago.

SI 프로젝트도 재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일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지난 1년간, 사업을 하면서 생존을 위해 SI 프로젝트들을 했다. 하면서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가 재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꼈던 프로젝트는 우리와 고객이 모두 최종 성과에 관심이 있었을 때이다. 고객과 한 팀인 느낌으로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재미도 있고 결과물이 나왔을 때의 보람도 크다. 그런데, 고객이 최종 성과에 관심이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성공보다는 완료를 원하는 고객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 관계의 불일치에서 기인한다.

그 불일치를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다단계 용역이다. 우리는 작은 회사다보니 우리가 따낼 수 있는 프로젝트는 대개 을보다는 병이나 정으로 참여하는 프로젝트다. 우리가 정이면 우리의 고객은 병이고 최종 고객은 갑이다. 갑은 당연히 성공에 관심이 많다. 돈 줘서 소프트웨어 만드는 건데 당연히 잘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을과 병은 그렇지 않다. 계약 내용대로만 잘 수행하면 돈은 받아낼 수 있으니까 그 결과물이 꼭 갑을 만족시킬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다. 완료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계가 멀수록 심해진다. 그러다보면 고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보게 된다.

  • 이번에 요구사항을 다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나중에 가서 바뀌면 적용하기 힘듭니다.
  • 지난 번에 문서로 다 컨펌했는데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애자일 방법론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대형 SI 업체는 아직도 이걸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S모 사가 을인 프로젝트에 들어갔는데 고객과의 요구분석 회의 때마다 이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스펙은 전부 초기에 확정하고 그거대로만 개발하려고 한다. 애자일에서 지적하는 전형적인 폭포수의 실패 사례다.

문제는 이 여파가 우리한테 온다는 데 있다. 우리는 프로젝트의 완료가 아니라 성공에 관심이 있다. 사실, 금전적인 이해 관계만 따지면 우리도 완료만 챙기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프로젝트가 재미 없다. 내가 뭐하려고 창업했는데, 재밌게 일하려고 창업한 것 아닌가. 재미가 있으려면 내가 만든 것이 좋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공에 초점을 두려 한다. 하지만, 을과 병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중에 돈 받아낼 근거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을과 병은 결국 폭포수를 우리에게 강요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간혹, 폭포수의 틀만 맞추고 재량권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맞출 건 맞춰주면서 성공을 향해 갈 수 있다. 하지만, 폭포수에 더불어 마이크로 매니지먼트까지 개입되기 시작하면 성공으로 가기는 힘들어진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화면 설계안에서 뭔가 개선하려고 하면 수많은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결국 돈 받는 게 중요해지면서 완료 지향적으로 가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가만히 보면 전체 팀 구성원은 5개 사에 15명 가량 된다. 그런데, 이 중에 프로젝트의 성공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인다. 어떻게 하면 지금의 사이트를 개선해줄 수 있을까 하는 대화는 처음 고객과의 미팅 때 이후로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의 이슈는 오로지 문서와 일정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해와서 다른 프로젝트들은 다 일정 잘 맞춰 왔느냐?"하고 물으면 묵묵부답인 건 또 왜일까.

그러니 우리는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할지 혼란스럽다. 갑을병정 모두의 이해 관계를 만족시키기가 너무 힘들다. 편하게 을, 병만 만족시키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재미도 없거니와 싫기도 하다. 어떻게든 갑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면 을, 병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러면 결국 갑도 만족시키기 힘들다. 어떻게 어떻게 갑을병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으면 그 방법은 우리가 힘들거나 귀찮거나 손해를 보는 방법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금액이 작더라도 되도록 직접 을이 될 수 있거나, 적어도 병이 되거나, 혹은 대형 SI 업체가 개입하지 않는 프로젝트만 하려고 입장을 선회하는 중이다.

다단계 용역이라도 이런 현상이 덜한 경우도 있다. 그 중 하나는 중간에 있는 업체가 "대강 철저"를 이해하는 경우다. 내가 군대를 현역으로 갔다온 건 아니지만 군대에는 "대강 철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FM과 반대되는 말인데, 군대의 여러 가지 룰들을 겉으로만 철저하게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룰의 실질은 깨면서도 겉은 지키는 것이 윗사람 아랫사람 모두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얘기다. 을이 까칠하게 CMMI대로 하면서 문서 다 만들라고 시킨다고 해서 곧이 곤대로 일정 짜고 문서 만들고 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적당히 형식만 맞춰주면서 실제로 필요한 일만 하는 것이다. 이런 회사가 고객인 경우는 우리가 정의 입장이라도 편하게 일할 수 있다. 물론 대강 철저의 개념이라면 우리도 열심히 협조해줄 것이고. 그러면 성공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사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SI 시장이 아직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시장이 작동하는 상태라면 성공보다 완료에만 관심이 있는 업체는 그 프로젝트 끝나고 나서는 돈을 받겠지만 그 이후에는 퇴출된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SI 시장은 시장이 아니다. 일거리의 80% 이상은 대기업의 그룹내 거래이고 나머지 20%의 대부분은 인맥으로 결정된다. 입찰도 무늬만 입찰이고 이미 내정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그냥 완료만 해줘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물론 완료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바로 퇴출이겠지만, 어쨋든 형식상으로는 완료를 시키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작은 업체는 을로 어딘가에 프로젝트 참여를 하기가 어렵다. 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인건비도 뽑기 힘든 작은 프로젝트 뿐이다. 그러면 작은 업체의 선택은 똑같이 인맥에 기대거나, 아니면 큰 업체에 병, 정으로 빌붙는 것이다. 결국 회사 자체의 실력을 쌓는 것이 별다른 눈에 보이는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으니 SI 업체들은 일거리만 잘 따오고 인력만 잘 투입하면 된다는 생각에 인력 업체로 변해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존하려면 SI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이런 상황에 적응해서 생존해갈 것인가, 아니면 게임의 법칙을 바꾸려고 시도해볼 것인가. 혹은 또 다른 무언가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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