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일기장/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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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by
Youngrok Pak
at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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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근황 토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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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중순, 이콜레모는 자금 부족으로 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일시 휴직 상태에 들어갔다. 올해 초부터 이콜레모는 채팅촌을 만들어 서비스를 하면서 자체 아이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대략 4~5개월 정도 서비스하다보니 어느 정도 먹히는 부분이 있다는 판단은 섰는데, 추진력을 한창 내야 할 시점에 돈이 떨어졌다. 그래서 투자를 받으러 다녀봤으나, 소프트뱅크 벤처스는 점심 먹으면서 한 시간 이야기하는 정도의 기회 밖에 주지 않았고, 케이큐브 벤처스는 소개를 통해서 그런지 상당히 깊이 있게 들어주었지만, 어쨋든 투자는 불발되었다. 멤버 중 나는 와이프 버프로 버틸 수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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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이 남아 있으려면 어쨋든 외주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제까지의 이콜레모의 역사 때문이다. 이콜레모는 그동안 외주를 해서 돈을 벌고, 돈이 좀 모이면 자체 아이템을 시도하는 쳇바퀴를 돌았는데, 이렇게 흐름이 끊기니까 당연히 좋은 결과를 생산해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템이 프로토타입 수준에 머물렀고, 시장에 제대로 출시했다고 말할 만한 아이템은 작년 말부터 올해 중순까지 8개월 간 출시한 채팅촌과 포토 리사이저 밖에 없었다. 그 8개월을 만들기 위해 외주를 한 시간은 무려 2년.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외주를 시작하면 지난 이콜레모의 역사를 반복하는 꼴이 된다. 그동안 뭘 잘못했는지 알면서 또 그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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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외주를 해야 한다면 외주 전문 업체로 변신하기. 시간 벌기용 외주는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외주 업체로 회사를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이콜레모는 영업력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는 이름이 좀 있어서 일거리가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티몬에서 악명을 날린 후로 일거리가 들어오다가도 내가 레퍼런스 체크해보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연락이 끊긴다. 그러니 내가 일거리를 따올 수 있는 경우는 <em>레퍼런스 체크가 뭐예요?</em>하는 팀이나, <em>나는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안 믿겠어</em> 하는 스타일의 팀 뿐이다. 이런 일들은 대개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나 혼자는 그럭저럭 잘 벌 수 있겠지만, 회사를 키워나가는 비전을 보기는 어렵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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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스타일 상, 프로젝트를 하면서 내내 클라이언트랑 싸우기 때문에, 잘 끝내줘도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는 드물다. 후속 일거리 제안이 오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그건 대개 우리가 돈 적게 받고 일했던 경우여서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는 볼 수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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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택한 것은, 돈 다 떨어지고, 사무실 보증금까지 빼서 정말로 잔고 0이 되고, 내 개인 돈까지 다 쓸 때까지 한 번 버텨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파산 직전까지 가면, 그 때 깨끗하게 포기하자는 거였다.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고, 나중에 다시 창업을 하더라도,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 태근이는 좀 아쉬워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줬고, 성원씨는 이렇게 결정이 나는 과정 자체에는 나에게 공감했다. 그래서, 일단 다른 멤버들은 이콜레모에선 휴직 상태가 되었고, 다른 곳에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섰다. 팀이 흩어진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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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가진 돈을 다 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개월? 사무실을 뺼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사무실을 빼봤자 2~3달 정도 차이 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이제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사 깨달은 거지만, 스타트업이 자기 아이템을 소신 있게 추진하려면 적어도 일년, 넉넉하게 본다면 2년 이상 돈 한 푼 벌지 않아도 자기 삶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된다. 물론 자기 돈도 많이 쏟아부을 수 있다면 더 좋다. 하지만, 꼭 돈이 많지 않더라도, 어쨋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만큼 재정 상황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적어도 핵심 창업자들은 그런 상황이어야 뭔가 해낼 수 있다. 5년이나 걸렸으니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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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돈 벌기 모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다시 일거리도 찾으러 다니고, 예전엔 다 씹었던 CTO 자리 제안도 가서 미팅해보고 그랬다. 그러다가 일거리를 하나 물었는데, 마침 그때 쯤 케이큐브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나에 대해서 좀 찾아본 모양인데, 악평이 많은 것은 충분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뭔가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 딱 들었을 때 내가 생각난 건 네이버 웹툰 담당자의 말이었다. 네이버 웹툰 담당자가 말하기를, 자기 임무는 재능 있는 만화가들이 포기하기 전에 발굴해내는 것이라고. 대단히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외주를 시작한 후라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이 때 계약도 안했었는데 그냥 확 끊어버렸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뭐 잘못 판단한 걸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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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외주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서 일단 차분하게 외주를 진행했는데, 또 이게 뜻대로 안되었다. 팀원들이 늘 외주할 때 내가 커뮤니케이션 전면에서 나서면 망친다고 그래서 이번엔 커뮤니케이션을 을에게 맡기고 나는 완전히 개발에만 전념하기로 했는데,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좀 문제가 있었다. 외주를 할 때 매니저가 해야할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과 개발자가 할 수 있는 분량 사이에서 적절하게 범위를 잡는 것이다. 근데 이게 잘 안되었다. 이게 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다들 알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서 못 참고 프로젝트를 드랍하기로 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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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겪고 나서 이콜레모에서의 지난 외주들을 좀 돌이켜봤는데, 난 이제 팀원들이 나의 협상력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좀 반박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클라이언트랑 늘 싸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 팀이 해낼 수 있는 범위로 협상을 해냈다. 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 협상을 맡겼을 때는 범위 협상이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특히 우리가 병이 되고 을에게 맡겼을 때는 항상 최악의 상황이 왔다. 오히려 내가 싸우는 부분은 내가 일 더 해줘가면서까지 클라이언트의 잘못된 기획을 뜯어고치려 했던 것들이고, 일을 줄이는 협상은 매끄럽게 잘 된 경우가 꽤 많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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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입장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어쨋든 우리 팀에서 개발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가는 나와, 다른 회사에 그냥 개발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을이 갑에게 같은 협상력을 발휘할 리는 없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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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일이 꼬이고 꼬여서 결국 돈 벌려고 했던 일인데 돈 한 푼 못 벌고 시간만 무려 6개월을 날리는 엿 같은 상황이 되버렸다. 사실 이 프로젝트가 똥이 될 거라는 건 계약 전부터 이미 많은 냄새가 났는데, 워낙 돈이 급한 상황이다보니 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그렇다. 이것도 이콜레모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일이다. 이콜레모가 자금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외주를 했을 때는 예외 없이 좋지 않은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어쨋든 이것도 나에겐 중요한 교훈이 되었고, 그 교훈 덕분에 몇 달 전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심각한 지금은 일거리를 올바르게 선택하는데 성공했다. 두 건 계약해서 하고 있는데, 둘다 금액이 그리 크진 않아도 내가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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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외주 끝나고 나서 다시 케이큐브 벤처스와 이것저것 대화가 오갔는데, 그 4개월 사이에 뭔가 상황이 변했는지, 4개월 만의 첫 미팅부터 이미 대화의 온도가 달라져 있었다. 이래저래 스토리들이 더 있었지만, 아뭏든 이번에도 투자는 불발. 그래도 이번엔 투자를 위해서 내가 할 수있는 건 다 해봤기 때문에 후회가 남지 않는다. 확실한 거 하나는, 지금의 나는 일반적인 VC에게 투자를 받기에는 투자 부적격이다. 이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앞으로 무의미한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서 상당한 수확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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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포기했다가 다시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 불발인 상황이므로, 나의 결론은 희망을 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간다. 돈 벌기 모드로 가는 것. 그럼 이제 외주를 할 수 밖에 없고,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말 충분한 돈을 벌기 전까지는 자체 아이템은 시도하지 않고 외주에 전념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제 확실히 결론을 내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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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거리는 다시 흩어진 팀을 모을 것인가 아닌가. 트위터에 일거리 구한다고 홍보한 이후로 일거리 제안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지만, 계약까지 간 건 둘 뿐이다. 물론 팀이 다시 모여서 준비된 상태였으면 좀더 적극적으로 해서 더 계약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회사의 성장을 바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여러 사람 감당할 만큼 일을 끌어올 자신이 없다. 그래서 고민 중인데, 이건 아무래도 다들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듯.</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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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올해 야심차게 진행했던 채팅촌은 실패하고, 투자도 될듯 말듯 하다가 실패, 4개월을 쏟아부은 외주는 돈 한 푼 못 건지고 오히려 앞으로 2개월 더 일한 돈까지 쏟아부어야 할 상황, 결국 올해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올해에 내가 이런 일들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이 모든 게 헛수고일 것이고, 내가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면 앞으로 뻗어나갈 힘이 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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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올해 내가 얻은 교훈들은 뭘까. 정리하면 이 정도인 것 같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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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 동안 돈 한 푼도 벌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재정 상황이 되어야 한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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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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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 협상은 내가 직접하거나,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맡긴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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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를 복잡하게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회사랑은 계약하지 않는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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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명성에서 악명으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실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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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한 계약을 참아가면서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건 확실한데, 나에게는 그걸 참을 능력이 없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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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구할 때는 타이밍이 생명이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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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의 투자는 투자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받을 수 있다.</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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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을 날린 교훈치고는 좀 부족한 감이 있긴 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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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제 당분간은 외주만 한다. 외주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은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약간만 더 까칠해졌다. 금액을 되도록 양보하지 않고, 사람 중요한 줄 아는 회사랑만 계약한다는 것. 그 판단은 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자기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이번에 내가 하기로 결정한 일도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기 팀원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을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리 없다. 이게 내가 티몬을 나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위에 언급한 똥밟은 프로젝트의 경우도, 갑 쪽에 프로젝트 리딩을 맡았던 사람이 프로젝트 드랍 문제로 짤렸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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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외주만 하기에는 분명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서 약간은 활동을 더 하기로 했다. 하나는 생산성 도구 만들기. 여러 회사의 외주를 하다보면 나 자신의 정보 관리가 매우 중요해진다. 계정도 여러 군데 많아지고 할 일도 엉키기 쉽고, 일정도 엉키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내 정보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도구들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조금씩 사업화를 엿볼 것이다. 또 하나는 오픈소스 활동. 외주를 하면서 쌓이는 코드들을 조금씩 오픈소스로 만든다. 어쨋든 다 외주에 도움은 되지만 한발짝씩 나가서 뭔가 축적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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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외주를 중심으로 일하고, 외주 일을 하면서 쌓이는 노하우들을 좀더 확장성 있는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 이게 현재 이콜레모의 전략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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