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13-02-21


Youngrok Pak at 11 years, 1 month ago.

5년 동안 해왔던 이콜레모를 접고 카카오로 입사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그 결정 과정, 이유들에 대해 밝혀놓고자 한다.

우선, 바로 두 달 전, 일기장/2012-12-14에도 썼듯이, 당분간 외주하면서 돈만 보고 달리겠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 결정의 기반은 제대로 스타트업을 하려면 1~2년 다른 걱정 없이 아이템만 보고 달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정도 준비 없이 외주 했다가 아이템 했다가 하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를 받아서 아이템에 올인하든지, 아니면 외주에만 전념해서 몇 년동안 돈을 많이 벌어놓든지 둘 중 하나다. 근데, 사실 내가 이콜레모를 창업한 이유는 뭔가 아이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내가 다닐 만한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다닐 만한 회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외주 업체로 성장해 나가는 시나리오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

 

근데 그렇게 결심한지 두 달 만에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돈만 보고 달리기로 결정해놓고 당장의 현금 관점에서는 가장 보상이 낮은 쪽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카카오에서 제시한 조건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근 1년 간 받은 오퍼 중에는 가장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반된 결정을 내린 이유. 첫째는 드림팀 재결성이다. 내가 오픈마루 다닐 때부터 줄곧 생각해오고 말해왔던 거지만, 난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일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일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검증된 드림팀이 다시 뭉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매력적인 기회였다. 이 드림팀은 티몬에서 결성되었던 팀이다. 티몬이 가장 가파른 성장을 했던 2010년 겨울부터 2011년 봄까지, 6개월간 그 폭풍 같은 성장을 불과 다섯 명으로 버텨냈었고, 내가 들어갈 때만 해도 밤 12시만 되면 다운되던 사이트였지만 2개월 만에 다른 경쟁사들보다 높은 성능과 안정성을 이뤄냈고 그때까지만 해도 더 복잡한 비즈니스 로직을 커버했다. 그 멤버들이 그대로 다시 뭉치고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드림팀, 채팅촌을 함께 개발했던 팀(티몬 드림팀과 교집합이 많다)이 붙고 이제 갓 신입이지만 이미 한 사람 몫을 하기 시작한 내 동생까지 합류해서 7명이 함께 카카오에 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좀 놀라웠던 것은 카카오에서 이렇게 팀으로 들어오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팀 그대로 들어오라는 제안은 많았지만 대부분 팀을 그냥 옵션 정도로 생각하는 느낌이었다면, 카카오는 팀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팀으로 들어가면 그 멤버를 뿔뿔히 흩어놓는 게 아니라 그 멤버 그대로 일하게 한다. 그게 가장 카카오에서 생산성이 좋았던 인재 흡수 방법이었다는 것. 합리적이지만 한국에 정말 이렇게 하는 회사는 흔치 않다.

사실 티몬에서 나온 이후에도 그 개발팀 멤버들을 지속적으로 만났고, 어떻게든 다시 뭉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콜레모의 역량 부족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데 이제 정말 기회가 생긴 것이다. 꼭 팀 인수라는 제안 형태 뿐 아니라, 카카오가 대부분의 개발자들에게 매력적인 회사라는 점도 우리 팀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만일 나만 카카오에 끌려하고 다른 사람들은 별 매력을 못 느낀다면 조건이 되도 팀 결성이 안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더욱 카카오가 끌렸다.

카카오 외에 다른 한 곳에서도 비슷하게 매력적인 제안을 받긴 했다. 그것도 딱 하루 늦게. 그것도 내가 신뢰하는 분에게서 받은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아마 반대로 하루가 빨랐다면 결정이 달랐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이콜레모에서 채용할 때 지섭이가 말했던 것처럼 인사에서 제일 중요한 건 운때가 맞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두번째 이유는 기회의 크기다. 이건 결국 두 달 전의 결정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카카오의 미래가 밝다면 돈이라는 관점만 따져봐도 카카오에 가는 것이 이득이다. 2년 전부터 카카오를 유심히 지켜봐왔고, 내부는 잘 모르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형태는 린 스타트업에 아주 가깝다고 생각했다. 특히 2개월 2명 서비스 개발이라는 방식을 들었을 때 참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카카오톡의 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좋은 회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초기 멤버 중에 내가 아는 사람도 많고, 중간에 들어간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카카오에 미팅하러 갔을 때 아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는데, 하나같이 빨리 입사하라고 했다는 것. 이런 회사 흔치 않다. 아니, 처음이다. 삼성도, SK도, KT도, NHN도, 오픈마루도 그렇지 않았다. 말하자면 직원들의 NPS가 엄청 높은 회사라는 것.

근데, 사실 그것보다 더 나에게 크게 느껴졌던 것은 전략적인 관점이다. 예전에도 트위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난 SNS의 미래는 페이스북이 아니라 MIM이라고 생각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MIM이 페이스북을 추월할 것은 틀림 없다. 그게 카카오톡이 될지 라인이 될지, 혹은 위챗이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한국 기업으로 페이스북과 싸워서 이긴다... 생각만 해도 엔지니어로서 흥분되는 일 아니겠는가? 구글의 엔지니어들도 빠져나가서 페이스북으로 가는 세상인데 말이다. 페이스북도 다분히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는 듯 하고, 그래서 페이스북 메신저를 계속 강화하면서 MIM의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고, 그게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카카오톡과 라인이 보여준 기민함이 페이스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위챗은 사용자는 많지만 아직 여러 면에서 뒤쳐져 있는 것 같고 결국 경쟁은 카카오톡과 라인일 텐데, 기왕이면 개발자 생태계를 살리는 방향인 카카오톡을 등에 업고 싸우는 편이 신나지 않겠는가. 카카오톡이 페이스북을 이겨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사실 내가 카카오 들어간다고 하니까 거긴 이미 들어가긴 늦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미 클만큼 큰 회사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물론 2~3년 전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 이상으로 앞으로의 가능성이 더 큰 회사다. 그러니까, 나는 카카오를 카카오톡이라는 아이템을 성공시킨 회사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스타트업이라는 관점으로 본다. 실력과 자본, 괜찮은 플랫폼을 가지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해볼 수 있는, 약간 좋은 출발점에 선 스타트업이라는 것이다. 결국 스케일의 문제다. 1.0 스케일로 보면 지금까지 카카오가 이룬 것도 워낙 크니까 늦은 것 같지만 0.1 스케일로 보면 출발점에서 약간 앞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근데 그 약간 앞서 있는 그 부분, 그게 바로 이콜레모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카카오에 입사한다는 느낌이라기보다, 우리 팀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투자를 받았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거기에 덤으로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카카오톡이 이만큼의 성공을 이뤄내기 전에 들어가는 것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요약하면 드림팀 재결성, 세계 정상급의 IT 회사와 맞붙어볼 수 있는 기회, 이 두 가지 때문에 카카오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

 

이콜레모를 포기하는 게 아쉽지 않았냐고? 당연히 아쉽다. 사실 이대로 외주 중심으로 해나가도 당분간 돈 벌 거리는 쌓여 있고, 지난 두 달간 한 프로젝트도 계속 계약연장 하자는 거 힘들게 거절해놓은 상태다. 작년에 돈 떨어졌던 멤버들도 다시 재합류했거나, 재합류 예정이다. 채팅촌도 아직 몇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게 보이고 있고. 카카오가 대단히 수평적인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이콜레모만큼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조직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 이렇게 내 맘대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접는다는 게 마음이 좋을 리는 없다. 벤처기업이 실패하는 건 1년 만에 실패하지만 성공하는데는 7년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5년을 해왔으니 2년만 더 버텨볼까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콜레모를 내가 창업한 이유를 떠올려보면 또 굳이 이콜레모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난 내가 다닐 만한 회사가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오픈마루도 내가 다닐 만한 회사는 아니었기에 오픈마루 퇴사자 1호 지섭이와 3호 내가 나와서 창업한 거다. 근데, 카카오는 내가 다닐 만한 회사인 것 같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 굳이 이콜레모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카카오에서 즐겁게 일하면서 더 좋은 회사로 키워나가면 되는 거지.

아뭏든 난 지금 카카오에서 일할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다. 입사일은 3월 4일. 하지만, 축하한다는 말은 되도록 안 들었으면 한다. 이콜레모를 접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축하를 받으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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