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월드컵결산


Youngrok Pak at 13 years ago.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월드컵을 돌아보며 결산하는 글이 별로 눈에 띄지 않네요. 이번 월드컵은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준 대회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부족한 실력이나마, 나름대로 이번 월드컵을 평가해보고 결산해보려 합니다. 많은 화제를 뿌린 월드컵이지만 독분비관에 맞게 기록성 결산보다는 이번 대회에 드러난 현대 축구의 조류에 대한 글로 시작하려 합니다. 편의상 반말로 하겠습니다-_- 양해 바랍니다.

이번 대회에서 전술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일까? 하나만 말하라면 아마도 압박축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압박축구의 기초는 과거 네덜란드의 토탈사커 돌풍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당시 토탈사커에서의 핵심은 압박축구라기보다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축구였고 압박축구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94 미국 월드컵이었다. 여기서 네덜란드, 불가리아 등 몇몇 나라가 압박축구를 선보였다. 하지만 전술적으로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98년 프랑스월드컵부터 본격적인 압박축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프랑스, 유고, 크로아티아, 아르헨티나. 이들은 강력한 미드필드의 압박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이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네덜란드였다. 이들은 뛰어난 체력, 스피드, 체격 등 유럽에서도 돋보이는 최강의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볼을 가진 상대를 끊임 없이 압박해서 볼을 상대가 가지고 있어도 마치 네덜란드가 공격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 압박력과 베르캄프의 존재, 이것이 네덜란드가 그다지 세련된 공격루트를 가지지도 않았고 플레이메이커도 부실했지만 4강까지 올라갔고 브라질을 경기 내용에서 압도한 이유다.

그렇다면 압박축구란 도데체 무엇인가? 압박축구는 기본적으로 미드필드에서 전진패스를 받은 상대가 돌아서지 못하게 만드는데 기초한다. 축구에서 공격자가 상대 골문을 향해 돌아서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공격자가 상대 골문을 향해 서게 되면 좌우의 드리블 돌파, 전진 패스의 세 가지 선택권을 쥐게 된다.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라면 슈팅이라는 또 하나의 선택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상대의 압박으로 인해 돌아서지 못한다면? 볼을 지키기 위해 뒤로 드리블하거나 백패스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압박이 강한 팀을 상대로 공격을 하면 마치 중앙선 너머에는 장벽이 있는 것처럼 중앙선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는 일이 반복되고 지루한 패스 돌리기를 하다가 뻥축구로 회귀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압박축구의 힘이다.

그러나, 과거의 압박축구는 일종의 대인마크 시스템이었다. 볼 가진 상대에 가장 가까운 선수 한 명만이 압박을 가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자기 가까운 선수에게 패스할 길목을 막는 수비를 하는 식이었다. 이것은 상대가 공격하기도 어렵지만 수비자가 볼을 빼앗기도 어렵고 빼앗더라도 상대는 적극적인 공세로 나온 입장이 아니라 역습을 노리기도 쉽지 않아 지루한 미드필드 공방전만이 계속될 뿐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더블팀(?)이다. 저런 용어를 축구에서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_- 어쨋든 볼을 가진 상대에게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수비수가 달라붙어서 적극적으로 볼을 빼내는 것이 현대 압박축구의 특징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빈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메꾸는 것이 기술인 것이다-_- 빈틈이 생기는 대신 그 대가로 상대가 볼을 빼앗길 꺼라고 예상하지 않는 상황에서 볼을 빼앗아서 역습을 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이 '공격적인 수비'를 가능하게 만든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시스템이다. 축구장에 포지션별로 못을 박고 그 못에 짧은 실을 묶어 자석을 매단다. 이게 수비수다-_- 그리고 쇠공을 굴린다. 이게 축구공이다--; 어떻게 되겠는가? 쇠공이 움직이면 주위에 가까운 자석이 쇠공 주위로 달라붙는다. 먼 곳으로 패스하면 패스한 곳 주위의 자석들이 움직인다. 그러나, 공이 자기 지역을 벗어나면 거기까지 따라가진 않는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압박 축구인 것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미드필드, 공격, 수비 사이의 간격이 좁아야한다. 그렇다. 콤팩트 사커다! 볼이 빈 곳으로 패스가 이루어져도 재빨리 다시 압박을 하려면 전장을 제한시켜놓고 제한된 공간에서만 패스가 가능하게 유도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수의 간격이 좁아야하는 것은 필수다. 그리고 이 콤팩트 사커가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이것이 둘째조건, 오프사이드 트랩이다. 콤팩트 사커는 롱패스 한 방에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세련된 오프사이드 트랩이 필요하다. 스위퍼 시스템의 약점이 바로 이거다. 콤팩트 사커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쓰리백이건 포백이건 일자수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체력이 좋아야한다. 공격할 땐 수비수들도 전체적으로 다 같이 올라가고 수비할 땐 공격수들도 다 같이 내려온다. 미드필더들이야 원래 많이 뛰었다고 해도 공격수, 수비수들도 이제 그만큼 뛰어줄 체력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이 압박축구가 유행이 되었다. 너나할 것 없이 대부분의 팀들이 압박축구를 구사했고 그렇지 못한 팀들은 처참한 결과(사우디, 중국)을 맞이해야했다. 98 프랑스월드컵의 유행이 미드필드에서부터 매끈한 패스로 차근차근 공격해들어가는 공격전술이었다면 이번 월드컵의 유행은 단연코 압박축구였고 성적은 압박축구를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에 비례했다. 단 하나, 브라질만 제외하면.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압박축구를 보여준 팀은 한국과, 터키, 독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을 꼽은 게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독일이 4강 이후부터 보여준 압박축구는 이번 대회 최고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은 경기당 7개 내외의 슈팅만을 허용한 수비력을 선보였고 그것은 압박축구의 힘이었다.

독일과 브라질, 우승후보 중에 가장 불안한 예선을 치른 나라들이지만 가장 성공적으로 리빌딩에 성공한 나라들이다. 우선, 독일. 독일은 이제 더 이상 뻥축구를 무기로 하는 팀이 아니다. 과거엔 킥앤러시를 중심으로 한 센터링, 거기에 이은 헤딩슛이 주무기였지만 지금은 꽤나 세련된 미드필드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펠러 감독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거기에 경기당 7개 내외의 슈팅, 3개 내외의 유효슈팅을 허용하는 탄탄한 수비력, 그리고 그 3개의 유효슈팅을 다 쳐내는 칸-_- 그리고 어떻게든 한 골은 집어넣는 결정력. 이것이 독일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뒤늦게 세계 축구의 흐름에 편입해서 성공한 케이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아쉬움이 남는다. 압박축구를 시원스럽게 뚫는 방법은 바로 힘과 스피드에 기반한 킥앤러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독일은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대로 오히려 미국이 킥앤러시로 역습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독일을 상대로 체격은 뒤지지만 힘에서는 뒤지지 않았고 발군의 스피드로 독일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포르투갈, 한국도 미국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도노번과 비즐리의 측면 공격은 세계 정상급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브라질의 이번 우승은 세계 축구의 조류를 거부하고 이루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브라질도 압박을 하긴 하지만 그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고 적극적이지도 않다.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도 경기를 지배한 것은 독일이었다. 하지만 브라질에는 뛰어난 개인기를 갖춘 화려한 공격진, 그리고 그것을 결정지을 능력이 있는 호나우도가 있었다. 아, 한국에 호나우도가 있었더라면.. 아마 전 경기를 3:0으로 이기면서 우승하지 않았을까-_- 스콜라리 감독의 뚝심도 히딩크 못지 않게 대단하다. 1골 먹으면 3골 넣으면 된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과거 2골을 넣어도 3골을 먹으면 진다는 주장을 펼쳤던 독일의 수비축구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그 바탕에 깔린 자신감은 같은 것이다. 이탈리아처럼 실력도 받쳐주지 않으면서 한 골이면 충분하다고 했다가 개망신을 당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_- 어쨋든 공격만 해도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즐기는 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브라질 축구팀, 스콜라리 감독에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우승컵을 안을 자격이 있다.

자, 이제 한국을 평가할 차례다. 한국은 어땠는가? 난 이번 한국팀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한국이 비록 4강에 머물긴 했지만, 그리고 거기까지 올라오면서 운도 꽤 많이 따랐지만 이것이 한국의 최선은 아니었다. 한국팀은 아직도 많은 약점을 노출했다. 먼저, 한국의 장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수비에서는 최고 수준의 압박축구를 구사했다. 이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상급의 골키퍼. 이것이 6경기 3실점의 정상급 방어율을 기록하게 만든 원인이며 세계 어느 팀이랑도 맞장 뜰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공격력도 나쁘진 않았지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이번 대회에서 최다 유효슈팅수를 기록한 팀이 바로 한국이다. 볼 점유율에서도 뒤진 경기가 하나도 없고 독일, 스페인전에서만 50:50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4강에 오른 다른 팀에 비해 득점은 저조했다. 2골을 기록한 경기는 세 경기, 무득점 경기가 두 번. 6골은 4강에 오르기에 충분하다고 하긴 힘든 골 수다. 이는 상대도 똑같이 압박을 가해올 때 그것을 뚫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상대 중 제대로된 압박축구를 구사한 팀은 스페인과 독일 뿐이고 한국은 그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스페인전 전반에 한국이 기록한 슈팅 수는 제로였다. 플레이메이커의 부족 때문이라고 보진 않는다. 플레이메이커 없이도 얼마든지 찬스를 만들 수 있다. 그보다 패스 타이밍이 늦은 게 문제였다. 스페인과 터키 경기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패스 타이밍이 절묘하게 반박자씩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한국 선수들은 상대 수비수가 접근해오길 기다렸다가 제치고 패스를 하려 했다. 그게 조별리그에선 통했지만 정상급 수비력을 갖춘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터키 상대로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 힘든 상황일수록 패스로 풀어가야하는데 일본 언론의 지적처럼 힘든 상황에서 개인기로 풀어가려고 하는 것이 한국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는 한국 선수들이 개인기가 많이 성장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아직 브라질처럼 거기에 의존할 정도가 아닌데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1:1에서 돌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좀 엉성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반박자 빠른 패스가 더 좋은 찬스를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또 하나 한국팀이 갖지 못한 것은 골결정력이다. 이번 대회에 한국팀은 슛 정확도와 유효슈팅수에서 정상급의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골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는 상대 골키퍼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나우도처럼 키퍼의 호흡을 읽고 반박자 빠른 슈팅을 하는 그런 게 필요하다. 황선홍에게는 어느 정도 그런 능력이 있지만 체력이 부족했고 안정환은 그런 게 많이 부족했다. 안정환의 장점은 수비수가 한 명 있을 때 한 명을 제치고 정확한 슈팅을 날리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상황은 많지 않았고 수비수 한 명도 만만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안정환은 한계가 명확한 선수라고 생각한다. 최용수를 좀더 키워보는 게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설기현은 좀더 정확한 킥이 필요하다. 슈팅 뿐 아니라 센터링에서도 정확성이 필요하다. 정확한 크로스를 앞에서 끊어먹는 슈팅, 이것이 있었다면 한국은 이번 대회 10골도 넘게 넣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한국팀의 가능성을 본 것도 이런 약점들 때문이다. 한국팀은 아직 많은 약점을 갖고 있고 일정상의 불리함을 떠안고도 4강에 진출했다. 그래서 다음 대회 때 이런 약점들을 보강한다면 홈이 아니라도 괜찮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스트라이커의 보강이 그렇게 힘든 과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국에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스트라이커가 많다. 제대로 갈고 닦지 못했을 뿐.

이번 대회에 또 하나 두드러진 것은 골키퍼들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이다.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는 전력의 4분의 1이다. 더 나아가 전력의 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키퍼가 5명 몫을 한다는 게 아니라 키퍼의 역할이 승부를 좌우하는 비율이 반이라는 것이다. 과거처럼 스트라이커가 혼자서 다 제끼고 슈팅을 할 수 있는 상황은 많지 않고 대부분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힘들게 슈팅을 하게 되므로 키퍼가 이것을 선방하느냐 아니냐가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번 대회는 특히 키퍼들의 역량이 두드러졌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는 칸과 두데크, 세계 최고 몸값의 키퍼인 부폰 외에도 프리델, 레치베르 등 한국과 맞선 상대들은 전부 키퍼가 부각되는-_- 현상이 나타난 것도 특기할 만한 상황이다. 한국이 유효슈팅수에서 정상을 차지하고도 저조한 득점을 기록한 것은 스트라이커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_- 이로 인해 이운재가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은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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