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을 대할 때 처음에는 아주 긍정적인 모드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일단 상대방이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가정하고, 프로젝트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본다. 딱히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되는 거 같다. 남들이 악평을 하는 프로젝트라도 내가 하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이런 태도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도움이 되긴 한데, 반대로 프로젝트 시작하자마자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왜 처음부터 몰랐을까 한탄하곤 한다.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는 고개들이 다들 "함께 좋은 제품을 만들어봐요" 모드로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프로젝트가 시작하면 "우리가 갑인데 시키는대로 해"식으로 돌변하는 고객들. 어떻게 하면 이런 고객들을 미리 분간해낼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짚이는 현상은 있다. 대체로 나이가 많을수록, SI 프로젝트 경험이 많을수록 갑 놀이를 좋아한다. 아마도, "을한테는 이렇게 해야 먹힌다" 같은 신념이 있는 듯하다. 부하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도 상관 관계가 있다. 들어야 할 자리에서 말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대체로 갑 놀이파다. 하지만, 사실 이런 경향성은 별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함께 프로젝트를 하려는 마인드가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고객은 워낙 만나본 경험이 적어서 어렵다.
어쨋든, 내가 이런 갑 놀이를 견딜 수 없다면 소프트웨어 용역 전문 업체라는 전략도 나한테 잘 맞는 전략은 아닌 것 같다. 일단 이번 프로젝트가 그걸 시험해보는 계기로는 좋은 것 같다. 사실 이콜레모의 외주 프로젝트 경험에는 지금 정도의 갑 놀이파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C&C는 지금보다 훨씬 더한 막가파식이었지만 다행히 우리와 C&C 사이에 중간 업체가 끼어 있었고, 지금처럼 우리가 갑 놀이에 직접 노출되지는 않았다. 8년 전에 SI할 때는 직접 갑 놀이에 노출되긴 했지만, 위에 팀장과 부장이 잘 막아줘서 나한테 압박이 직접 오진 않았고. 그렇다면 내가 갑 놀이를 봐줄 수 있는지 아닌지를 노골적으로 경험해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과연 내가 그런 걸 참아낼 수 있을까.
거참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