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2011-03-14


Youngrok Pak at 12 years, 4 months ago.

티몬에서 일한지 벌써 5개월이 되어 가는데, 그 동안 이뤄놓은 게 별로 없다. 내 10년 경력을 통털어 최악의 실패를 경험하는 중이다. 그만둘려고 하다가 일단 2주 휴가 다녀와보기로 한 상태. 실질적으로 쉬진 못했지만 그동안 갖지 못했던 여유가 생겨서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해보면서 그동안의 회고를 해보았다.

처음 접했던 티몬의 상태는 이야기로 듣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소스 코드의 수준은 심각했지만 내가 본 것 중 최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최악은 물론 NHN에서 경험한 대마왕이고 이 정도 상황은 앞으로 영영 접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소스 코드만 보면 C는 충분히 줄 수 있었다. 개판인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고민의 흔적들이 보이고, 복잡도가 무한대로 증가하는 그런 코드도 아니었다. 충분히 리팩토링하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수준으로 보였다. 그래서, 일단은 점진적인 개선이라는 방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멍청한 판단이었다. 웹이라는 분야는 개발이 쉽기 때문에 일견 쉬운 분야로 보이고,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RoR 등이 퍼지면서 쉬운 분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웹에는 운영이라는 커다란 부분이 있다. 그래서, prototype으로 돌아가는 사이트를 만드는 것과, 실제 돌아가는 사이트를 만드는 것 사이에는 넘사벽이 있다. 이 넘사벽을 처음부터 내가 망각하고, 소스 코드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솔직히 이 판단은 지금도 좀 쪽팔린다. 내가 이렇게 단순하게 사고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다 ㅠ.ㅠ

아뭏든, 그래서 실제로 업무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날이 더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 때도 내가 판단을 수정하는 반응 속도가 느렸다. 한 번 갈아엎자는 판단을 내렸다가 철회한 것도 매일매일 쏟아지는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 개선 작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산스파비스 사태 때 바로 꺠달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갈아엎자는 결정에 방해가 들어와도 굳건하게 추진했을 것이고, 개발 속도는 빠르지 않았겠지만 지금 쯤이면 많은 진도가 나가 있었을 것이다.

상황 판단에 실수를 했던 이유를 조금 더 파고 들면, 과거의 성공 경험이 내 눈을 가린 것이다. 내가 간혹, 작은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같은 방법으로 성공을 재생산하려고 한다면서 비판하곤 했었는데, 이번엔 내가 그 꼴이었다. 난 NHN에서 새로운 프레임웍 도입 및 각종 시스템 개선 작업을 기존 레거시와 조화시키면서 해낸 경험이 있었다. 그 때는 내가 2년 차였을 떄고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많은 경험이 쌓이고 다양한 시스템을 다루어본 상태 아닌가.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그 때는 NHN의 막강한 SE들과 DBA들이 떠받치고 있었고, 운영도 안정되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엔지니어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개발자 수도 많아서 내가 개선 작업을 하는 동안 기존 시스템을 유지할 인력이 있었다. 하지만, 여긴 엔지니어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경영진 포함, 다들 말로만 중요하다고 하는 상황) 인프라도 없었고 인력도 부족했다. 하지만 스마트패스원 프로젝트에서 말도 안되는 스케쥴을 소화해낸 자신감이 어느새 자만심으로 변해 있었던 나에겐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패스원 프로젝트이 10할의 승리였던 셈이다. 이번 일이 나에게 다케다의 도이시성 전투처럼 새겨지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이후에는 좋은 스텝을 많이 밟았다. 벤더 페이지를 먼저 공략해서 개선하면서 패턴을 잡아냈고, 그 패턴을 메인 사이트에 적용하면서 많은 부분 개선이 되었다. 그러면서 시스템의 이해도가 높아져서 드디어 갈아엎기를 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성능도 많이 개선했고.

하지만, 자잘한 실수는 계속 저질렀다. 양지리조트 사태, 파파이스 사태, 티몬스퀘어, 신한카드 모두 나의 멍청한 판단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양지리조트는 그냥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인데, 중요도 판단을 냉정하게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때 석천씨, 종훈씨와 함께 셋이서 회고를 했는데, 그 대책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그 대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 그 리스크에 대해 요청자가 체감할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인데, 실질적으로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다.

파파이스 사태는 일종의 책임 떠넘기기 심리가 발동했다. 파파이스 딜 2주 전 회의 때 이대로 진행하면 서버는 죽을 꺼고, CS 폭탄 터질 꺼라고 경고했고, 광고 다 중지시키자는 이야기까지 했었다. 그러고 나서 난 경고했으니까 이제 내 책임 아냐라는 심리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이든 아니든 책임져야 하는 건 결국 개발실과 CS였다. 이것 역시 진작부터 깨달았어야 하는 일이다.

책임 떠넘기기 심리가 발동한 또 다른 이유는 이미 내 감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난 티몬의 삼성스런 비즈니스 마인드가 싫다. 삼성의 전략을 칭찬하는 발언도 많이 했지만, 내가 그런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이 문제는 사실 해결 불가능한 문제 같아보이지만, 일단 사람 하나 믿고 한 달 정도는 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티몬스퀘어와 신한카드에서 멍청한 판단을 한 것도 감정적인 이유가 작용했는데, 이건 좀 다른 이유다. 사실 2월부터는 계속 품질 개선의 시급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품질 개선에 역행하는 요청들은 단호하게 막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사람들에게 No라고 말하다보니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고 뭔가 좀 해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거기다가 외부 업체가 엮여있다보니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한카드는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낸 안인데, 협상력 좋은 사람이 가서 관철시켜버리는 바람에 결국 하게 되버렸고, 티몬스퀘어는 물리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단지 며칠 미루는 걸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범했던 오류는, 이게 그냥 내가 단호하게 마음을 먹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절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도 그 자체로 커다란 스트레스인데, 그걸 내가 그냥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좀더 체계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어쨋든 그 사람들도 티몬 망하라고 그러는 것은 아닐 터. 부분 최적화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젠 정말 회고를 해야겠다. 스마트패스원 때도 미친 듯이 바빴고, 40일 연속 야근도 하고 그러느라 팀 회고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개인 회고는 꾸준히 했고, 그 덕에 결정적인 개선들을 몇 번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티몬에서는 어쩐 일인지 그 회고가 잘 안되었다. 일단 이게 왜 안되었는지도 좀 분석이 들어가야 할 것 같고, 휴가 끝내고 복귀하면 주간 회고부터 정착시켜야겠다.

어쨋든, 좋은 경험이긴 한 것 같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좋은 경험은 그닥 더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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