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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대안언어축제2006후기 | edited by Youngrok Pak at 11 years, 1 month ago.

 

자원봉사자의 부담

대안언어축제 2006이 끝났다. 사실 준비하면서 정말 힘들었었고 중간에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건 안하겠노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정작 행사가 끝나고 나니 힘들었던 기억은 흐릿해지고 뿌듯함이 남는다. 이것이 내가 찾았던 자원봉사의 모티브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작년 대안언어축제의 자원봉사자들도 축제가 끝나고 나서 이런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고 좋은 경험이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작년 자원봉사자들은 단 한 명도 이번에 자원봉사로 나서지 않았는가. 왜 하나같이 올해는 일반 참가자로 참가해보고 싶었다고 하는가? 이번 대안언어축제를 준비하면서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이 점을 처음부터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보았다면 절대 이렇게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 좋은 분위기로 끝난 축제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대안언어축제의 성공은 자봉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자봉들이 희생하게 되는 것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관심. 직장인들은 기본적으로 회사일이 우선일 수 밖에 없고 회사일 외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기가 어렵다. 자봉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들은 대개 근무시간에 해야 하는 일들인데 근무 시간에 대안언어축제에 관한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나마 우리 팀이 후원하는 일이라 어느 정도는 업무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무 시간에 대안언어축제에 관련된 연락을 돌리고 하는 일들이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축제의 준비에 잡일이 많다는 것. 준비과정의 절반 이상이 별로 즐겁지 않은 사소한 잡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메일 한 통 쓰는 것조차도 간단한 일 같지만 잘 모르는 사람에게 메일 보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서론도 좀 집어 넣어야 하고 문구도 다듬어야 하고 답장도 확인해야 한다. 전화는 그런 종류의 부담은 적지만 안 받는 경우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시 걸어야 하는 경우도 많고 전화번호 찾기 힘든 경우도 많아 역시 부담이다. 이런 일들을 즐겁게 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아직도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행사 당일. 일이 몰리기 때문에 축제를 즐길 수가 없다는 것. 왜 일부러 발표자들이 자봉을 위한 자리까지 만들어줬는데 자봉들은 오지 못하는가. 왜 밤에 술자리를 하는데도 내일 일 걱정을 해야 하는가.

희생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좋아서 자원한 일인데 무슨 희생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안언어축제를 잘되게 하는데 자원하고 싶었던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행사 당일 하루 4시간도 제대로 못 자면서 혹사당하고 싶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사 준비에 참여하고 싶었던 사람은 많겠지만 매주 월요일을 고정 약속으로 정하고 싶었던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ExtremeProgrammingExplained2ndEdition의 이야기를 끌어온다면 MutualBenefit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내가 이 문제를 깨달은 것은 4주 전이다. 학생 자봉이 참가하면서 일의 진행이 빨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작년 자봉이 왜 아무도 다시 참여하지 않았을까를 고민해보면서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었다. 그 때부터 고민하면서 행사가 1주일 남았을 때쯤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지만 이런 저런 제약조건들로 이번 행사에는 그 고민을 반영할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다음 대안언어축제의 스타트업에 참여하려는 이유이다. 자봉들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어쨋든 내가 내린 해답은 이런 것이다. 학생, 자봉, 발표자의 구분이 없는, 모든 참가자가 자봉이고 발표자인 그런 축제를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봉이 했던 일 중에 참가자가 직접 하면 안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뢰라는 전제조건에 모두 합의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미 대안언어축제에 오는 사람들은 자발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책상 옮기고 의자 옮기는 건 다 참가자들이 직접 하는데 과일 씻는 거라고 못할 이유가 있을까? 마이크 고장나면 굳이 자봉이 뛰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스티커를 자봉이 지켜야 하는 것은 스티커 나눠주는 룰을 자봉이 정했기 때문이다. 참가자 모두가 함께 정한 룰이라면 그냥 어딘가에 놔두고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해도 룰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신뢰는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뢰해야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현재의 대안언어축제만 해도 다른 컨퍼런스에 비하면 참가자들에 대한 아주 높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린 더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키가 바로 그런 이상적인 상황을 현실에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CollectiveIntelligence, 바로 대안언어축제에 필요한 것이다. 축제 시작 6개월 전부터 메일링 리스트를 개설하고 메일링 참가자들이 모두 참가자 및 자봉이 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행사에 카메라가 필요하면 메일링에서 카메라 가져올 사람을 모집하면 된다. 장소 답사를 가야 한다면 메일링에서 답사 갈 사람을 모집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라는 메일 한 통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달에 한 번쯤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다. 아이디어들을 실험해보기도 하고 머리를 맞대고 브레인스토밍도 한다. 물론 몇몇 사람은 facilitator 역할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희생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행사 당일에도 참가자 각자가 자신의 필요를 해결할 수 있다면, 먹거리는 알아서 챙겨 오고, 멀티탭 모자라면 알아서 사무실 가서 빌려오고 없으면 사오고, 시간 되면 알아서 모이고 세션 장소 알아서 찾아가고 한다면 자봉은 따로 필요 없다.

정말 내 생각처럼 이렇게 잘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서 다음 대안언어축제의 스타트업에는 꼭 참여해서 이렇게 끌고 가보고 싶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스타트업 뿐 아니라 끝까지 참여할 것이다.

리더십

이번 축제에서 또 하나 느낀 것은 리더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난 원래 일반적인 관리자의 역할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 챙겨서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확인하고 그런 매니저의 역할이 필요한가에 늘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대자봉을 맡았지만 관리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facilitator 역할만 하고 그 외에는 다른 자봉과 같이 해왔다. 막판에는 일이 좀 몰리면서 어쩌다보니 관리하는 형국이 된 경우가 몇 가지 있지만 대체로 이번 대안언어축제는 대자봉 한 사람의 지휘 하에 자봉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 자봉 각자가 셀프 리더십을 갖고 움직였다. 특히 행사 당일에는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다들 우왕좌왕하면서 일 분담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그랬는데 특별히 내가 뭔가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다들 자기 할 일을 잘 찾아서 했고 일정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자봉들 소감 발표하는 시간에 과일 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걸 깨달았다. 난 과일을 씼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미 알아서 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생각해보니 정말 내가 신경쓰지도 않았던 일들이 다 잘 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챙겨야 할 일을 챙기지 못한 대자봉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래서 MS와의 커뮤니케이션도 구멍이 나서 MS 스폰서도, C# 발표도 제대로 안되었고 좀 안타까웠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다 챙길 수 있긴 했을까? 원래 이런 일을 골고루 다 챙길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사람만이 리더를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면 내가 선택한 방향 자체는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티커

이번 행사 최고의 아이디어는 단연 스티커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뿌듯 이펙트]를 통해 막강한 언어교환의 어포던스를 제공한 것 같다. 이 아이디어도 누구 한 사람의 아이디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원래 발의는 김창준씨의 팔찌에서 시작해서 포도송이, 티셔츠, 띠 등의 아이디어로 이어졌다가 몇 번의 프로토타입을 거쳐 이름표로 결정되었다. 붙이는 모양도 여러 가지로 하다가 빙고 아이디어가 나와서 정사각형 배열로 하고 또 단순히 글자만 쓰면 재미 없다고 이왕 붙이는 거 해당 언어의 로고를 붙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거기에 이름표 밑판을 흑백으로, 스티커를 칼라로 찍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채택된 후 실행 과정에서도 여러 사람이 로고를 찾고 디자인했다. 이번 행사 준비 과정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가장 활발하고 즐겁게 준비한 것이고 그만큼 효과도 좋았던 것 같다. 스티커가 넘 맘에 들어서 세트별로 한 30장씩 챙겨왔다. 나눠줘야지.

세션

대안언어축제 2006의 공식 세션은 16개, 자바 컨퍼런스에서 하루에 하는 세션 수랑 같은 수를 2박 3일간 소화한다. 세션만 놓고 보면 대안언어축제의 진가를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참가자들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다행히도 대안언어축제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이번 축제를 성공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사실 세션은 더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예 없애는 게 바람직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세션을 들었는데도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는 소감을 토로했다. 튜토리얼이 아무리 친절하게 준비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의 학습 속도를 맞출 수는 없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따라가기 힘들게 된다. 그런 면에서 맨투맨 언어교환은 위력적이다. 궁금한 걸 바로 물어볼 수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더 잘 배울 수 있다. 나도 간만에 파이썬을 가르치는 쪽으로 언어교환을 했는데 파이썬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가르쳤는데도 그 과정 중에 많이 배운 것 같다. BOF도 세션 형태로 하는 것보다는 OST로 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세션과 BOF를 줄이고 OST와 언어교환을 늘리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다.

물론 그래도 씨앗이 될 만한 무언가는 필요하다. 전혀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언어교환을 잘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하지만 그 씨앗이 꼭 세션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람 그 자체가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통사라는 역할이 좀더 드러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20명의 발표자와 각각의 세션보다 40명의 통사가 더 좋은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믿어야 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자봉

자봉끼리 행사 전에 좀더 친해지는 자리가 필요했다. 원래 계획했던 술자리를 한 번 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다만, 자봉끼리 너무 친밀하면 새로운 멤버가 자봉으로 참여하기 힘들다는 문제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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