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근황 토크.
올해 중순, 이콜레모는 자금 부족으로 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일시 휴직 상태에 들어갔다. 올해 초부터 이콜레모는 채팅촌을 만들어 서비스를 하면서 자체 아이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대략 4~5개월 정도 서비스하다보니 어느 정도 먹히는 부분이 있다는 판단은 섰는데, 추진력을 한창 내야 할 시점에 돈이 떨어졌다. 그래서 투자를 받으러 다녀봤으나, 소프트뱅크 벤처스는 점심 먹으면서 한 시간 이야기하는 정도의 기회 밖에 주지 않았고, 케이큐브 벤처스는 소개를 통해서 그런지 상당히 깊이 있게 들어주었지만, 어쨋든 투자는 불발되었다. 멤버 중 나는 와이프 버프로 버틸 수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멤버들이 남아 있으려면 어쨋든 외주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제까지의 이콜레모의 역사 때문이다. 이콜레모는 그동안 외주를 해서 돈을 벌고, 돈이 좀 모이면 자체 아이템을 시도하는 쳇바퀴를 돌았는데, 이렇게 흐름이 끊기니까 당연히 좋은 결과를 생산해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템이 프로토타입 수준에 머물렀고, 시장에 제대로 출시했다고 말할 만한 아이템은 작년 말부터 올해 중순까지 8개월 간 출시한 채팅촌과 포토 리사이저 밖에 없었다. 그 8개월을 만들기 위해 외주를 한 시간은 무려 2년.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외주를 시작하면 지난 이콜레모의 역사를 반복하는 꼴이 된다. 그동안 뭘 잘못했는지 알면서 또 그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외주를 해야 한다면 외주 전문 업체로 변신하기. 시간 벌기용 외주는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외주 업체로 회사를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이콜레모는 영업력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는 이름이 좀 있어서 일거리가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티몬에서 악명을 날린 후로 일거리가 들어오다가도 내가 레퍼런스 체크해보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연락이 끊긴다. 그러니 내가 일거리를 따올 수 있는 경우는 레퍼런스 체크가 뭐예요?하는 팀이나, 나는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안 믿겠어 하는 스타일의 팀 뿐이다. 이런 일들은 대개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나 혼자는 그럭저럭 잘 벌 수 있겠지만, 회사를 키워나가는 비전을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내 스타일 상, 프로젝트를 하면서 내내 클라이언트랑 싸우기 때문에, 잘 끝내줘도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는 드물다. 후속 일거리 제안이 오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그건 대개 우리가 돈 적게 받고 일했던 경우여서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돈 다 떨어지고, 사무실 보증금까지 빼서 정말로 잔고 0이 되고, 내 개인 돈까지 다 쓸 때까지 한 번 버텨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파산 직전까지 가면, 그 때 깨끗하게 포기하자는 거였다.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고, 나중에 다시 창업을 하더라도,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 태근이는 좀 아쉬워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줬고, 성원씨는 이렇게 결정이 나는 과정 자체에는 나에게 공감했다. 그래서, 일단 다른 멤버들은 이콜레모에선 휴직 상태가 되었고, 다른 곳에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섰다. 팀이 흩어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돈을 다 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개월? 사무실을 뺼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사무실을 빼봤자 2~3달 정도 차이 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이제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사 깨달은 거지만, 스타트업이 자기 아이템을 소신 있게 추진하려면 적어도 일년, 넉넉하게 본다면 2년 이상 돈 한 푼 벌지 않아도 자기 삶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된다. 물론 자기 돈도 많이 쏟아부을 수 있다면 더 좋다. 하지만, 꼭 돈이 많지 않더라도, 어쨋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만큼 재정 상황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적어도 핵심 창업자들은 그런 상황이어야 뭔가 해낼 수 있다. 5년이나 걸렸으니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다.
그래서, 이제 돈 벌기 모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다시 일거리도 찾으러 다니고, 예전엔 다 씹었던 CTO 자리 제안도 가서 미팅해보고 그랬다. 그러다가 일거리를 하나 물었는데, 마침 그때 쯤 케이큐브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나에 대해서 좀 찾아본 모양인데, 악평이 많은 것은 충분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뭔가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 딱 들었을 때 내가 생각난 건 네이버 웹툰 담당자의 말이었다. 네이버 웹툰 담당자가 말하기를, 자기 임무는 재능 있는 만화가들이 포기하기 전에 발굴해내는 것이라고. 대단히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외주를 시작한 후라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이 때 계약도 안했었는데 그냥 확 끊어버렸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뭐 잘못 판단한 걸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다행히 외주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서 일단 차분하게 외주를 진행했는데, 또 이게 뜻대로 안되었다. 팀원들이 늘 외주할 때 내가 커뮤니케이션 전면에서 나서면 망친다고 그래서 이번엔 커뮤니케이션을 을에게 맡기고 나는 완전히 개발에만 전념하기로 했는데,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좀 문제가 있었다. 외주를 할 때 매니저가 해야할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과 개발자가 할 수 있는 분량 사이에서 적절하게 범위를 잡는 것이다. 근데 이게 잘 안되었다. 이게 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다들 알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서 못 참고 프로젝트를 드랍하기로 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이콜레모에서의 지난 외주들을 좀 돌이켜봤는데, 난 이제 팀원들이 나의 협상력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좀 반박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클라이언트랑 늘 싸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 팀이 해낼 수 있는 범위로 협상을 해냈다. 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 협상을 맡겼을 때는 범위 협상이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특히 우리가 병이 되고 을에게 맡겼을 때는 항상 최악의 상황이 왔다. 오히려 내가 싸우는 부분은 내가 일 더 해줘가면서까지 클라이언트의 잘못된 기획을 뜯어고치려 했던 것들이고, 일을 줄이는 협상은 매끄럽게 잘 된 경우가 꽤 많았다.
아마 입장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어쨋든 우리 팀에서 개발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가는 나와, 다른 회사에 그냥 개발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을이 갑에게 같은 협상력을 발휘할 리는 없다.
아뭏든 일이 꼬이고 꼬여서 결국 돈 벌려고 했던 일인데 돈 한 푼 못 벌고 시간만 무려 6개월을 날리는 엿 같은 상황이 되버렸다. 사실 이 프로젝트가 똥이 될 거라는 건 계약 전부터 이미 많은 냄새가 났는데, 워낙 돈이 급한 상황이다보니 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그렇다. 이것도 이콜레모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일이다. 이콜레모가 자금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외주를 했을 때는 예외 없이 좋지 않은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어쨋든 이것도 나에겐 중요한 교훈이 되었고, 그 교훈 덕분에 몇 달 전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심각한 지금은 일거리를 올바르게 선택하는데 성공했다. 두 건 계약해서 하고 있는데, 둘다 금액이 그리 크진 않아도 내가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아, 그리고 외주 끝나고 나서 다시 케이큐브 벤처스와 이것저것 대화가 오갔는데, 그 4개월 사이에 뭔가 상황이 변했는지, 4개월 만의 첫 미팅부터 이미 대화의 온도가 달라져 있었다. 이래저래 스토리들이 더 있었지만, 아뭏든 이번에도 투자는 불발. 그래도 이번엔 투자를 위해서 내가 할 수있는 건 다 해봤기 때문에 후회가 남지 않는다. 확실한 거 하나는, 지금의 나는 일반적인 VC에게 투자를 받기에는 투자 부적격이다. 이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앞으로 무의미한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서 상당한 수확이다.
아뭏든, 포기했다가 다시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 불발인 상황이므로, 나의 결론은 희망을 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간다. 돈 벌기 모드로 가는 것. 그럼 이제 외주를 할 수 밖에 없고,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말 충분한 돈을 벌기 전까지는 자체 아이템은 시도하지 않고 외주에 전념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제 확실히 결론을 내렸다.
고민거리는 다시 흩어진 팀을 모을 것인가 아닌가. 트위터에 일거리 구한다고 홍보한 이후로 일거리 제안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지만, 계약까지 간 건 둘 뿐이다. 물론 팀이 다시 모여서 준비된 상태였으면 좀더 적극적으로 해서 더 계약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회사의 성장을 바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여러 사람 감당할 만큼 일을 끌어올 자신이 없다. 그래서 고민 중인데, 이건 아무래도 다들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듯.
어쨋든 올해 야심차게 진행했던 채팅촌은 실패하고, 투자도 될듯 말듯 하다가 실패, 4개월을 쏟아부은 외주는 돈 한 푼 못 건지고 오히려 앞으로 2개월 더 일한 돈까지 쏟아부어야 할 상황, 결국 올해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올해에 내가 이런 일들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이 모든 게 헛수고일 것이고, 내가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면 앞으로 뻗어나갈 힘이 될 것이다.
그럼 올해 내가 얻은 교훈들은 뭘까. 정리하면 이 정도인 것 같다.
- 스타트업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 동안 돈 한 푼도 벌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재정 상황이 되어야 한다.
- 돈이 없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 외주 협상은 내가 직접하거나,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맡긴다.
- 계약서를 복잡하게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회사랑은 계약하지 않는다.
- 내 이름은 명성에서 악명으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실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 불공평한 계약을 참아가면서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건 확실한데, 나에게는 그걸 참을 능력이 없다.
- 인재를 구할 때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 VC의 투자는 투자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받을 수 있다.
1년을 날린 교훈치고는 좀 부족한 감이 있긴 하다.
암튼, 이제 당분간은 외주만 한다. 외주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은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약간만 더 까칠해졌다. 금액을 되도록 양보하지 않고, 사람 중요한 줄 아는 회사랑만 계약한다는 것. 그 판단은 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자기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이번에 내가 하기로 결정한 일도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기 팀원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을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리 없다. 이게 내가 티몬을 나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위에 언급한 똥밟은 프로젝트의 경우도, 갑 쪽에 프로젝트 리딩을 맡았던 사람이 프로젝트 드랍 문제로 짤렸다.
근데, 외주만 하기에는 분명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서 약간은 활동을 더 하기로 했다. 하나는 생산성 도구 만들기. 여러 회사의 외주를 하다보면 나 자신의 정보 관리가 매우 중요해진다. 계정도 여러 군데 많아지고 할 일도 엉키기 쉽고, 일정도 엉키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내 정보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도구들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조금씩 사업화를 엿볼 것이다. 또 하나는 오픈소스 활동. 외주를 하면서 쌓이는 코드들을 조금씩 오픈소스로 만든다. 어쨋든 다 외주에 도움은 되지만 한발짝씩 나가서 뭔가 축적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외주를 중심으로 일하고, 외주 일을 하면서 쌓이는 노하우들을 좀더 확장성 있는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 이게 현재 이콜레모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