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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일기장/2006-06-14 | edited by Youngrok Pak at 11 years, 1 month ago.

 

토고를 이겼다. 거의 예상대로의 경기 내용과 결과다.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토고한테 졌으면 얼마나 쪽팔렸을까. 감독 사퇴나 훈련 거부 같은 거 때문이 아니라 토고가 워낙 약하다. 그런 면에서 한 명 퇴장한 토고에게 2:1은 아쉽다. 실상 토고 정도는 압도할 수 있어야 프랑스, 스위스랑 맞설 수 있을 텐데. 선수들의 개인 기량은 2002년보다 꽤 좋아졌지만 팀 전력은 그 때보다 많이 약하다. 이는 아드보카트의 책임이다. 보수적인 선수 기용, 미드필드를 무시하는 전략, 초점 없는 훈련. 감독으로서의 기술적 역량은 분명 최고 수준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아드보카트를 쉽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독이 든 만두를 용감하게 집어 삼켜서 여기까지 끌고 왔기 때문이다.

전술상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은 공격이다. 언론에선 골 먹을 때마다 수비를 탓하지만 사실 골 안 먹는 팀은 없다. 공격이 문제인 것은 뻥축구로 회귀했기 때문이다. 미드필드에서의 공격적인 전진 패스는 사라지고 후방에서 뻥 차서 공격수에게 맡기는 식의 공격이 주류를 이룬다. 이 방식 자체가 프랑스식 미드필드 축구보다 나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킥앤러시를 소화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체력 뿐 아니라 체격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기를 빠른 템포로 가져가야 한다. 잉글랜드가 킥앤러시로도 강한 것은 빠른 경기 템포를 이끌고 체격 조건이 유럽에서도 최강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표팀은 수비 공간에서 질질 끌다가 공격수에게 떠넘기는 듯한 뻥축구를 구사한다. 잘 될 리가 만무하다.

이건 사실 전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세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직 선수들은 실수를 두려워 한다. 근데 두려워하는 실수는 팀의 실수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다. 공격적인 전진 패스가 실패하면 패스한 사람의 책임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지지만 뻥 차서 공격수가 경합하게 만들면 절반은 공격수 책임이 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대충 차 놓고 알아서 해주길 비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감독이 해결해줘야 한다. 근데 보수적인 스타일에 실수에 관대하지 않은 아드보카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심리가 마지막 프리킥 찬스에서 슛도 안 때리고 시간 끄는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도 후반에는 미드필드에서 경기를 풀어가면서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영표와 박지성, 안정환의 존재는 빅 리거가 팀에 어떤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난 man of the match는 이천수였다고 본다. 전반부터 줄곧 좋은 움직임과 부지런함을 보여주었고 동점골까지 터트렸다. 이번 월드컵 끝나고 다시 메이저로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면 좋겠다.

근데 상황이 98년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대를 품고 진출한 월드컵에 첫 골을 터트렸지만 한 선수의 퇴장으로 역전패한 한국. 그리고 그 승리를 기반으로 다른 두 강팀과 무승부를 이루며 16강에 진출한 멕시코. 이후 네덜란드에 대패한 후 벨기에전에서 투혼을 발휘해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 이번에 우리가 그 때의 멕시코처럼, 토고가 그 때의 한국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 3:1로 이기기만 했어도 딱 맞아떨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머, 어쨋든 원정 첫 승을 올렸고 조별 리그에서 가장 먼저 승점을 쌓았다는 의미는 큰 것 같다. 원정임에도 홈처럼 구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 존경한다. 한국, 경제가 어렵니 어쩌니 해도 토고보다 20배는 부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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