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쓰기 귀찮은 글들.
일기장/2013-09-23
이번 주부터는 전략 검토를 한 내용들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일단 올 연말까지의 단기 목표는 다음 세 가지.
- 서버 비용과 생활비, 활동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입원 확보
- 단기적인 성과를 바라볼 수 있는 서비스 다섯 개 이상 출시
- 장기적인 성과를 위한 포석: http://newsqu.net, http://springnote.ecolemo.com, 오픈소스 활동 등
이에 따른 이번 주의 목표.
- 스타트업 개발 강의 1차를 완벽하게 준비해서 진행하는 것.
- 안드로이드 앱 하나 오픈
- 파이썬 namespace package 좀더 파보기. 가능하다면 python-dev에 이슈 제기해본다.
- 뉴스쿠 사용자 activation 시나리오 만들기
- 먼저 연락 오는 건들에 대해서는 열려 있는 자세 유지.
이번 주 목표를 다 달성한다면 꽤 만족스러울 것 같다.
일기장/2013-08-29
카카오 그만두고 긴 시간 고민했는데, 결국 구직은 포기하고 이콜레모를 부활시키기로 했다. 내 나이와 평판을 고려하면 그나마 지금 제의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가 마지막 취직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기 쉽지 않았는데, 반대로 내 회사를 하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다 정말로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그런 느낌이라는 거다.
이콜레모를 부활시키긴 해도 예전처럼 멤버를 모으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엔 동료 욕심이 많아서 구인을 많이 하고 다녔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사람을 책임질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혼자 해볼 예정이다. 1인 기업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콜레모 5년 중에 본격적으로 스타트업을 한 건 8개월 남짓이고 대부분이 외주였는데, 이번에는 스타트업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난 지금 돈이 없으므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외주해서 시간 벌고 짬짬이 스타트업하면 또 죽도 밥도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돈 안 벌고 스타트업에 올인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쉬웠으면 아마 진작에 결정했을 것이다. 외주로 시간 벌기 전략도 틀렸고, 외주로 회사 키울 것도 아니고, 당장 투자 받을 확률도 높지 않다면 스타트업은 못하는 거 아닌가?
솔직히 위의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답은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비합리적인 자신감을 믿고 전략을 세웠다. 파트타임으로 돈을 벌면서 단기적으로 승부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실행하는 것이다. 사실 뉴스쿠 같은 건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한 아이템이라서 투자 없이 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좀더 단기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아이템을 하게 될 것이고, 좀더 trial & error를 빠른 사이클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전략은 사실 이콜레모가 이제까지 해왔던 외주해서 시간 벌고 남는 시간에 우리 아이템 하기와 근본적으로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왜 외주해서 시간 버는 전략이 나쁜지를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심리적으로 집중이 안되니까, 헝그리정신이 부족해서 등등의 이유를 분석이라고 할 순 없겠지.
내가 분석한 이유는 이렇다. 우선, 이콜레모는 주력 아이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주력 아이템이 없으니까 어차피 외주해서 시간을 벌었을 때 새로 아이템을 구상해야 한다. 그러다가 돈 떨어지면 다시 외주를 하는데 그러면 그 사이 하던 아이템에 대한 컨텍스트가 끊기고 열정도 식는다. 그러면 두번째 외주가 끝났을 때 그 아이템을 다시 이어서 하게 될 가능성이 낮다. 외주하는 동안 그 아이템에 대해 고민해보게 될 가능성도 낮다. 말하자면, 우리는 A를 하는 중에 틈틈이 돈을 벌기 위해 외주를 한다가 되어야 하는데, 그 A가 없었다는 것. 만약에 외주를 중간중간에 하더라도 오랜 기간 계속하고 있는 아이템이 있었다면 축적된 무언가가 뒤늦게라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외주를 거의 풀타임으로만 하다보니 설령 A가 있어도 컨텍스트의 끊김이 심해서 극복하기 어려웠다. 만약 파트타임으로만 했다면 다른 시간에는 아이템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가치를 축적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외주해서 시간 벌고 틈틈이 우리 아이템 하기가 사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한 전략이 아니었다. 그냥 돈 떨어지면, 아 외주해야겠구나 하면서 하고, 돈 있으면 이제 우리 꺼 해볼 수 있겠네 했던 것이다. 설령 외주해서 시간 벌기가 나쁜 전략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전략이었다면 좀더 체계적으로 실행했을 것이고 더 나은 결과를 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점들에 유의해서 이 전략을 실행한다면 괜찮다는 판단이 섰다. 높은 수익보다 적정 수익을 얻을 수 있고 파트타임으로 할 수 있는 일거리들을 하면 컨텍스트 끊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컨텍스트 끊김이 적으면 하던 아이템이 흐지부지 되는 일도 적을 것이고, 일단 시장에 내놓기 전에는 중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나가면 A의 부재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단,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파트타임으로 수지가 맞는 일거리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사실 이콜레모가 풀타임 외주 중심으로 했던 이유는 일거리가 대부분 풀타임 요구로 들어왔다는 것과, 그런 일이 더 수지가 맞았다는 것인데, 파트타임만 해서는 충분한 유지비를 벌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 가지 전략을 생각해봤다. 그 중 하나가 요즘 추진하고 있는 스타트업 개발 강의다.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이 IT 스타트업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실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일단은 교육비를 받고, 또 그런 스타트업들이 연결되면 관련된 컨설팅 일도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예전처럼 트러블 슈터로 좀더 포지셔닝하는 것. 전에도 쓴 바 있지만, 난 다른 사람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코칭보다는, 직접 가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트러블 슈팅을 더 잘하고 좋아한다. 이런 트러블 슈팅 일들은 단기적인 경우가 많고, 급할수록 보수도 좋기 때문에 파트타임 일로 괜찮은 것 같다. 이런 식이면 어찌되었든 밥벌이는 하겠지.
예전과 달리 정부의 창업 자금도 고려해볼 것이다. 전에는 그거 따러 다닐 시간에 개발이나 더 하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래저래 좀 생각이 바뀌었다. hwp 문서 작성은 여전히 고통스럽겠지만, 세금이 엄한 데 가는 것보다는 내가 잘 써주는 게 낫겠지. 세금도 많이 냈는데 말이야.
그리고 두번째 전제는, 스타트업 아이템을 실행하기에 필요한 역량을 내가 다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일단 아이디어로 사업화 전략을 세우는 건 아직 나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기술력은 문제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 혼자서도 국내 스타트업의 50%는 기술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스타트업도 다른 전략이 좋으면 성공할 수 있으니 기술력이 부족해서 뭔가 못해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품 개발은 가능하다. 근데 과연 그걸로만 스타트업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내가 창업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는 기술력만으로 창업하면 망한다는 거였다. 물론 난 그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일리 있는 포인트는 있다. 일단은 부족한 부분은 외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이번에 두 달 놀면서 내가 알게된 사실은, 예상대로 내 평판이 나쁘긴 한데, 그래도 여전히 날 믿어주고 도와주려는 사람이 많다는 거였다. 그래서 동료를 구하진 않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한 조언은 많이 들으러 다닐 생각이다. 사실 나도 생각보다 귀가 얇아서 흔들흔들하곤 하는데, 이번엔 흔들리지 않고 중심 잡으면서 조언을 구할 것이다.
어쨋든 매우 도전적인 상황임은 틀림 없다. 인맥도 좁고 돈도 없고 동료도 없는 엔지니어 한 명이 기술력 하나 믿고 창업하는 상황이니까. 그래도 이번엔 왠지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기장/2013-06-24
5년 전 지섭이랑 처음 창업했을 때였다. 그 때는 딱히 외주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소개가 들어와서 외주 일거리 관련 미팅을 했었다. 간단한 프로젝트 같아서 2명이서 2개월 하는 비용으로 당시 단가대로 견적을 내줬다. 그랬더니 그 고객은 너무 비싸다면서 한참 가격 협상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는 두어 달 후에 우리가 제시한 금액의 절반 정도로 해준다는 개발팀을 구했다.
그리고는 1년 후 어쩌다가 다시 그 사람을 만났다. 사실 난 그 아이템 잘 안될 꺼라고 봤기 때문에, 오픈했다가 지금은 다시 서비스 접은 상태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아직 서비스 런칭조차 못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상태를 보여주는데, 정말 이게 1년 동안 개발한 수준인가 싶었다. 솔직히 고소한 기분이 들었고, 이쯤되면 당연히 그 때 우리한테 돈 제대로 주고 일 맡길 걸 하는 후회를 하겠지 싶었다.
근데 왠걸, 이 고객은 우리에게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해왔다. 원래 예산 잡았던 것 중 그 개발팀에게 쓰고 남은 돈을 우리한테 줄 테니 소스코드 받아서 마무리 해달라는 것. 그 실패를 겪고 나서도 배운 게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거절했고, 결국 그 고객은 끝내 서비스를 런칭해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웹 오피스 일을 의뢰했는데 지섭이네 회사랑 우리랑 합쳐서 6개월에 구글 독스의 80% 수준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비용 견적을 냈는데, 무려 3분의 1을 깎자고 나왔다. 물론 거절했고, 1년 쯤 지나서 문서편집은 빠진 채 뷰어만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일을 5년 내내 한 스무 건은 겪은 것 같다.
물론, 돈이 정말 모자랐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돈이 모자라서 사업을 중단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는데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근데, 그 고객들의 태도는 자기들이 돈이 모자라서 못 주겠다는 게 아니었다. 왜 니들에게 그렇게 큰 돈을 줘야 하는가였다. 태도만 달랐어도 다시 생각해봤을지 모른다.
여기서 더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 무어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작정 믿으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지. 그래서, 간혹 중간 단계를 제시하곤 한다. 1~2주만 계약해서 일을 시켜보고 진척상황을 본 후 다음 계약을 진행하자. 난 사실 이게 매우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걸 받아들이는 고객은 없었다. 만약 1~2주 해보고 아니라는 판단이 설 경우 그 1~2주 투자한 비용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일을 하도 많이 겪다보니 요즘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주어진 기간에 당신이 요구하는 소프트웨어를 완성해줄 수 있으니까" "만약 더 싸게 해낼 수 있는 개발팀을 알고 있으면 그냥 거기 맡기세요." 이 말이 꼭 그런 개발팀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은 아닌데 이 말을 해주면 그 때부터 "저렴한 개발팀"을 찾기 시작한다. Good luck. 뭐, 사실 적은 돈으로 완료해주는 호구 개발자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행운이 따른다면 찾을 수 있겠지.
그래도, 이런 일들이 많이 반복되면서 업계가 좀 학습을 했는지, 요즘은 사람들이 단가 개념을 알고 프로젝트를 제안해와서 협상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너 왜 그렇게 비싸" 하는 사람이 없는 것만도 감지덕지. 아니 그런 사람 있긴 한데, 적어도 입밖으로 내진 않더라.
개발자 시장(?)이 레몬마켓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비싸게 준다고 오렌지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싸게 주면 거의 입도 대지 못할 만큼 신 레몬을 사게 되니까 그걸 피해야 하는 것 뿐이지.
예전에 권일이가 나한테 해준 조언이 있다. 아니, 권일이는 정한이한테 배웠다고 그랬던가? 무언가 물건을 살 때의 조언인데, "잘 모르면 돈을 써라"는 것. 좋은 구매를 하려면 그 물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보를 습득할 시간은 없고, 좋은 물건을 사고 싶다면 다른 대안은 돈을 더 많이 쓰는 것. 물론 이건 그 반대도 된다. "돈이 없으면 시간을 들여서 공부를 하라"도 된다. 그러니까 자동차 사려고 그 많은 정보를 뒤적거렸지.
비슷한 이야기로, "시간을 절약하려면 돈을 써라"도 있다. 물론 이것 역시 "돈을 절약하려면 시간을 써라"도 된다.
뭔가 스토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는데, 사실 별달리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은 아닌 것 같다. 나한테 일 줄 때는 돈 좀 쓰라는 얘기 밖에 안되는 것 같잖아. 그래서, 다음 번에는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최저 수준의 개발자를 구별해내는 법, 그리 뛰어나지 않은 개발팀으로 프로젝트를 완료해내는 법, 충분한 예산이 있을 때 그 돈으로 제대로 레버리지를 하는 법, 스타트업이 적은 비용으로 뛰어난 개발자를 구하는 법 등으로 포스팅을 해보려고 한다.
근데 뭔가 이 비슷한 내용을 블로깅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 건, 이 데자뷰 같은 일이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일까? 내 블로그는 검색이 안돼 ㅠㅠ
일기장/2013-05-20
사실 이번 일이 좋은 점도 하나 있다. 내가 원하는 회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된 것. 지금까지 생각이 정리된 건 세 가지다.
- 자신의 직관보다 사용자의 반응을 우선시하는 클라이언트(경영자)
- 명확하지만 추상적인 미션
- 실무자를 설득하는 경영자(manager)
1번은 전에 일기장/2010-05-16에 글을 써둔 바 있다. 외주의 관점에서 쓴 글이지만, 회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어쨋거나 자신의 의견이 사용자의 반응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클라이언트랑 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2번은 페이스북에 쓴 바 있다. 미션은 팀원들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일이 없을 만큼 충분히 명확해야 하고, 미션의 틀 안에서 창발이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추상적이어야 한다.
이번에 이야기할 것은 3번. 대부분의 회사는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실무자가 경영자를 설득해서 승인을 받으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지만, 난 그 반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영자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실무자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난 사실 이게 당연해서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왔고, 지금까지 딱히 그렇지 않다고 느낀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런 주제에는 관심도 없었다. 외주를 할 때도 클라이언트들은 신기하리만큼 열성적으로 그 기능을 왜 넣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비록 그 이유가 납득이 안 가는 이유는 있을지언정, "그냥 해" 하는 식의 클라이언트는 별로 없었다. 적어도 "남들이 하니까" 같은 형편 없는 이유라도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최근에 내가 일 하다가 빡쳐서 계약금 돌려주고 쫑낸 프로젝트에서조차도 하는 짓이 밉상이긴 했지만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인색함은 없었다. 회사가 망해서 옮겨야 했던 첫 회사도 내 아버지뻘인 사장이 프로젝트의 당위성에 대해서 신입인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고, NHN에서도 납득이 안 가는 프랙티스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창희형이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반대로 NHN에서 내가 주장해서 시작한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별로 열심히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프레임워크 만들 때도, 모니터링 툴 만들 때도, cron을 대체물 만들 때도 그냥 이거 하겠다고 하니까 알아서 해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안 그런 회사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NHN에서 당시에 내가 주장한 프로젝트들이 쉽게 승인된 것도 딱히 그런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경영자들과 내 생각이 단순히 일치했기 때문일 뿐이라는 것도 이제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회사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운 좋게 내가 12년 동안 그런 회사/상황을 피해다닌 것 뿐일 게다. 그러다 갑자기 일반적인 회사를 만나서 난 멘붕에 빠진 것이고. 그래서 설명할 필요를 이제 느낀다.
이건 복잡한 설명보다 그냥 내가 일하는 방식을 늘어놓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팀장으로 프로젝트를 할 때 디자인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항상 디자이너에게 준다. 디자이너의 디자인에 내가 동의하지 않을 때도 많고, 그럴 때는 계속 의견 제시를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정권이 디자이너 당사자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생각으로 그치지 않도록 명시적으로 말해주려고 애쓴다. 명시적으로 결정권이 본인에게 있다고 말해주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내가 이걸 깨닫게 된 것은 오픈마루에서 ECUS할 때였다. 당시에도 나는 비슷한 마인드로 팀장질(?)을 했는데, 결정권이 디자이너에게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그냥 회의 때마다 열심히 디자인에 대해 딴지를 걸고, 마지막에 그래도 맘대로 하세요... 이렇게 마무리 짓곤 했는데, 그게 보기에 따라서는 마음대로 하라면서 맨날 딴지 건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2~3개월 째부터는 결정권이 디자이너 본인에게 있다는 점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했는데, 잘 받아들여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그 이후로는 명시적으로 결정권을 이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표현하려고 했고, 그 이후로는 그럭저럭 내 취지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
개발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떤 코드가 좋은 코드인지, 어떤 식으로 구현해야 할지, 어떤 아키텍처가 좋은지에 대해서 명확한 철학이 있고, 우리 팀이 그 철학에 맞게 개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런 의견을 제시하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실제로 키보드를 잡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둔다. 실무자가 스스로 결정할 때 가장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권이 실무자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내 의견을 받아들일지 흘려들을지도 선택할 수 있고, 그럼 나도 더 부담 없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내가 실무자를 설득하는데 실패하면 실무자의 뜻대로 가는 것이지 실무자가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다.
개발 뿐 아니라 서버 작업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서버 구성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나도 나 나름의 서버 구성에 대한 철학이 있고 노하우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서버 작업을 맡길 때 그런 방향성에 대해서 많이 표현한다. 서버에 대한 사용자로서의 요구사항도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최종적인 선택은 늘 터미널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의 몫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납득하는 일을 할 때 더 높은 성과를 낸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있을까? 실무자가 납득하지 않아도 일을 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결정권이 없는 고객 서비스 담당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다들 많이 경험해봤을 것이다. 생활의 달인들도 자신이 납득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술들을 하나씩 착안해낸 것 아니겠는가? 단순해보이는 그런 일들도 정말 잘 해내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납득하지도 않는 일에 사람들이 창의성을 발휘할까? 빵을 왜 비닐로 싸야 되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직원이 번개같이 빵을 포장하는 기술을 개발해낼까? 창의성은 결정권이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매번 허락을 받아야 된다면 무슨 창의적 발상이 가능하겠는가. 소프트웨어 개발은 그런 일과 달리 창의성이 필요 없는 일이었나?
물론, 정치적으로는 좀 이야기가 다르다. 어쨋든 회사에는 소유주가 있는 거고, 그 소유주가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만들 권리가 있다. 그래서, "실무자가 경영자를 설득하는 문화"도 정치적으로는 올바르다. 왜 오너가 자기 마음대로 못하나? 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내가 자유롭고 평등한 회사를 만들려고 했던 것도 그 자체로는 내 마음대로 회사를 만드는 활동인 거였고. 그래서, 그런 걸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그게 회사의 크기를 오너 개인의 그릇에 한정하게 된다는 것 뿐이다. 물론 그 그릇의 크기가 스티브 잡스 쯤 되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마지막으로 야망 패자에 나온 글귀 하나.
한 사람의 힘은 무리에 대적할 수 없고 한 사람의 지혜는 만물에 미치지 못한다. 하급의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쓰고 중급의 인간은 사람들의 힘을 쓰며 상급의 인간은 사람들의 지혜를 쓴다.
일기장/2013-05-03
글 쓰기 전에 먼저 부탁 하나. 이 글은 다른 곳에 퍼가거나 링크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기장/2013-02-21에서 이콜레모를 접고 카카오로 들어가는 이유를 주저리주저리 써놓았다. 그리고 카카오에 입사한지 두 달, 그 동안의 소감을 적어보고자 한다. 링크하지 말아달라고 미리 밝힌 이유는 그 소감이 몹시 부정적이고 글 내내 카카오를 엄청 씹을 것이므로 굳이 이 이야기가 카카오의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냥 내 지인들에게 내가 이렇게 갑갑해하고 있다는 것을 토로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트위터에도 노출하지 않고 페이스북에 친구공개로만 노출할 것이다. 내가 페이스북에 전체공개가 아닌 글을 쓰는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입사 첫날의 느낌은 '응?' 이었다. 둘쨋날, 입사 취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째, 카카오에 입사한 선택을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갑갑해서 미칠 것 같다.
왜 이렇게 후회하는가? 그 답은 지난 번에 쓴 글 일기장/2013-02-21에 나와 있다. 내가 카카오에 들어가려는 이유, 그 이유를 하나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드림팀 재결성과 글로벌 IT 기업과 붙어볼 수 있는 기회.
드림팀 재결성은 이틀 째에 바로 깨졌다. 입사하기 전에 일부분 예고가 되긴 했지만, 팀을 쪼개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도 충분히 피력했고, 쪼개더라도 충분히 협업할 수 있는 형태로 프로젝트만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하지만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냥 팀을 반으로 뚝 잘랐다. 그 이유는 초기 프로젝트 팀으로는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이건 오히려 카카오가 신규 프로젝트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초기에 아이템 탐색 과정에선 다양한 크기의 팀이 요구된다. 명확한 아이템이 있어서 출발한 팀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 개의 아이템 후보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아이템의 초기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비용은 제각각이다. 한 명이 하루만 작업해도 되는 게 있는 반면, 3~4명이 2~3주씩 작업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면 아이템 발굴 과정에서 팀이 실시간으로 이합집산을 하면서 가설을 검증하면서 아이템을 좁혀나가게 된다. 그런데, 7명이 많다고 그냥 둘로 딱 나눠서 아이템 두 개 정해서 각각 하라는 것은 아이템 발굴 과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는 얘기다. 당연히 납득할 수 없었고 반발했지만, 또 그렇다고 끝까지 반발하면서 이번에 말썽장이들이 들어왔군 하는 시선을 받고 싶진 않았다. 뭐, 끝까지 반발한다고 결론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서, 내가 카카오에 들어간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입사 이틀째에 깨진 것이다.
우리팀은 팀 구성이 좀 독특하다. 단순히 장단점과 역할만 놓고 보면 지금처럼 반으로 나눠도 각각의 반이 충분히 full stack이 되므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나누면 그냥 평범한 팀이 되버린다. 비교를 하자면, 티몬에서의 5인방일 때의 팀은 당시 경쟁사의 20명 팀보다 높은 퍼포먼스를 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팀 구성이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근데 지금은 그냥 개개인의 합산만큼 밖에 안된다. privacy 문제도 있기 때문에 더 깊이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팀 케미스트리라는 게 단순히 스펙 덧셈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카카오가 팀웍을 중시한다는 말은 뻥이었다.
글로벌 기업과 붙어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도 일주일 째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카오는 글로벌 의지가 없다. 글로벌 진출을 안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자꾸 단서를 달긴 하지만, 실질적인 행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목표 자체가 글로벌이 아니라 그냥 한국에서 착한 네이버가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글로벌은 노리고 싶다고 노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정말 글로벌을 노릴 수 있는 아이템을 발굴해내는 거대한 행운을 누렸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걷어차버렸다. 사실 성공이라는 건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는 능력인데, 카카오가 잡았던 기회가 얼마나 큰 기회였는지를 잘 몰랐던 듯 하다. 아뭏든 이제는 그 기회가 거의 사라져가는 중이다. 라인은 미개척지를 한발 앞서서 개척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기존 영토를 굳혀나가고 있다.
어쨋든, 입사하고 한 달 정도는 글로벌 노래를 불렀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왜 나를 믿고 글로벌을 맡겨야 되느냐는 식의 반응까지 들었다. 그렇게 못 믿을 꺼면 뭐하러 뽑았나? 카카오 초기에 글로벌에 실패한 경험이 움츠러들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아뭏든 앞으로 6개월 안에 파격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글로벌은 그냥 라인 차지라고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사내의 분위기도 라인이 앞서가는 것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쿠팡과 위메프의 추격을 겪으면서 그 와중에 경쟁자들에게 배우려고 했던 티몬과 몹시 비교된다. 물론 소셜커머스는 지나치게 경쟁자를 의식한 감은 있지만, 시장 상황상 경쟁을 안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카카오는 일부 정신승리까지 나오고 있을 만큼 안이하다. 아뭏든 이렇게 나의 글로벌 꿈은 좌절되었다.
나중에 다시 기회 아닌 기회가 찾아오긴 했다. 내가 하도 불만을 투덜거리고 다녀서 그런지 그럼 하고 싶은 아이템을 제안해보고 한 번 추진해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근데 이미 프로젝트 시작했는데 그걸 내버려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이든 실패든 마무리되면 그 다음에는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 때는 이미 라인 2억 돌파한 이후일 걸?
아뭏든 이렇게 내가 들어가려고 했던 결정적인 이유 두 가지가 모두 깨졌다. 근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내 방식대로 일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무너졌다. 성공은 과연 운인가에서 난 우리 팀에 부족한 것이 돈(=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시간)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고, 그 부족함을 카카오에 들어오면 채울 수 있기 때문에 1~2년 안에 성공을 맛볼 수 있을 거라고 호언했다. 근데 들어와서 그 돈은 채워졌는데, 나머지 부분이 모두 실종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팀도 깨졌고, 내 노하우들이 담긴 방식을 실행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핵심은 린 스타트업이다. 사실 내가 들어가기 전에 경영진에서 전 직원에게 린 스타트업 책도 나눠주었고, 린 스타트업 세미나도 하고 전체 회의 때도 이야기하고 심지어 우리 팀은 린 스타트업의 시범 사례를 보여달라는 미션까지 받았다. 그래서, 당연히 린 스타트업을 제대로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이미 회사 구조 자체가 린 스타트업보다는 대규모의 퀄리티 높은 제품을 유지보수하기에 적합한 구조로 변해있었다.(변해있었다고 말하는 건 옛날에는 안 그랬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인데, 사실 옛날에도 정말 안 그랬는지는 몹시 의심스럽다.)
경영진이 린 스타트업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린 스타트업의 철학에 깊이 동의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빨리"라는 키워드 때문인 것 같았다. 최근 카카오에서 진행한 신규 프로젝트들이 6~9개월 걸렸는데 그게 너무 느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뭔가 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데 마침 린 스타트업이 떠오르는데 거기서 "빨리"를 이야기하니까 그냥 끌어온 것 같다. 여기에도 직원들에 대한 불신이 느껴졌다. 그 직원들이 잘 못해서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침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있는 팀들인데 결코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은 카카오 회사 구조상 누가 프로젝트를 해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 책임은 경영진에 있는 것인데 오히려 직원들에게 느려진 책임을 묻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 팀은 내가 시작하기 전부터 린 스타트업은 퀄리티 희생하는 걸 각오해야 한다고 수십 번 엄포를 놔서 그나마 실험적인 시도들을 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도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프로젝트의 첫 릴리스까지 4주가 걸렸고, 그 릴리스에서 시험해볼 가설은 두 가지였는데, 오픈 셋째 날에 가설 하나는 검증되었고 다른 하나는 미지수로 나왔다. 딱 이 결론까지 얻는 것을 이콜레모에서 진행했다면 아마도 다 합쳐서 사흘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외부의 스타트업이었더라도 뛰어난 개발자 한 명 이상 있는 팀이라면 일주일 이내에 같은 결론을 얻었을 것이다. 이게 현재 카카오의 스피드다. 내가 12년간 겪은 모든 회사 중에 가장 느리다. 오픈마루보다는 당연히 느리고 2002년의 NHN, 외주로 일해본 삼성보다도 느리다. 티몬이랑은 비교 불가다.
뭐가 그렇게 느리냐는 것도 일일이 짚고 싶으나, 역시 민감한 문제들이 얽혀 있어서 일단은 참기로 한다. 이건 회사 안에서 계속 문제 제기를 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엔지니어들의 협조는 매우 신속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대응할 수 있는 속도로는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사람이 대응하는 구조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지연이 발생한다. 아마존이 AWS를 만들게 된 과정은 아마 이 지연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아뭏든 린 스타트업에 적절한 구조라고는 할 수 없다.
카카오가 자유로운 조직이라는 점도 인정할 수 없다. 그냥 방만한 조직일 뿐이다. 비전과 규율이 명확히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제각기 행동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할 뿐이다. 반대로 자율이 필요한 부분에는 자율이 없다. 그저 제멋대로 하고 싶은 사람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가 있을 뿐이다. 개발자들이 기술을 마음대로 선택하는 자유? 요즘 그건 자랑거리도 안된다. 수평한 팀 문화? 스타트업이라면 당연하지. 근데 내가 겪어본 회사들 중엔 별로 수평적인 편도 아니다. 적어도 오픈마루보다는 수직적인 조직이다. 난 그 오픈마루가 갑갑해서 뛰쳐나온 사람이란 말이지.
카카오에 입사해서 자리를 좀 잡고 나면 데려오고 싶은 인재들도 여럿 있었다. 전부터 같이 일하고 싶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 사람들 추천해서 입사해도 같이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젠 자신 있게 데려오지도 못하겠고.
티몬 있을 때도 맨날 시발시발 거렸지만 그 때는 그래도 일 자체는 몹시 재미있었다. 그리고 티몬 경영진을 그닥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보다 한참 어린 그들에게 배울 점은 무척 많았다. 하지만 카카오에선 별로 배울 게 없다. 내가 직원으로 다닌 회사 중에는 아직까지도 오픈마루보다 좋은 회사는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불만이 많은데 왜 다시 안 나가냐고? 뭐 그건 당연히 현실적인 이유다. 카카오에 들어오기 위해 기존 고객의 계약 연장 제안을 거절했고, 2월 달엔 회사 정리하면서 보내느라 수익도 못 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 나가면 다시 일거리를 찾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 시간을 감당할 수 없다.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리스크 있는 선택을 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래, 이제 나도 월급쟁이 된 거다.
같이 들어온 사람들의 입장도 있다. 사실 나 이외에는 대부분 카카오에 적응은 하고 있고, 만족도가 나쁘지는 않은데, 여기서 내가 나가버리면 팀원들 입장도 몹시 애매해진다. 나가더라도 적어도 저 사람들 박영록이랑 같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다들 잊을 때쯤 나가야지.
그래서 이래저래 1년은 버터보기로 한 상태다. 그 사이 달라질 희망은 좀 있지 않을까? 냉정하게 말하면 없는 것 같다. 두 달 동안 아무 변화 없는 조직이 1년이라고 변화가 생길 리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그래도 두 달 동안 위에 요구한 변화가 여러 개 있는데, 어느 하나도 실현되거나, 혹은 명확한 답조차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경영진 스스로도 변화를 위해 워크샵도 다녀오고 공청회도 하고 했지만, 아무 변화가 없는 건 마찬가지.
뭐 아뭏든, 월급을 두 번이나 받고 보니 이렇게 한가하게 일해도 월급이 나온다는 사실을 비로소 믿게 되어서, 앞으로 10개월쯤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듯 하다. 요즘은 일에 대한 재미는 포기하고 코딩에서 재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아뭏든, 나 지금 카카오에서 일하는 게 너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니 잘 되어 가고 있냐고 묻기보다는 그냥 위로를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