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Youngrok Pak at 10 years, 5 months ago.

제목 쓰기 귀찮은 글들.


일기장/2013-02-21

5년 동안 해왔던 이콜레모를 접고 카카오로 입사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그 결정 과정, 이유들에 대해 밝혀놓고자 한다.

우선, 바로 두 달 전, 일기장/2012-12-14에도 썼듯이, 당분간 외주하면서 돈만 보고 달리겠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 결정의 기반은 제대로 스타트업을 하려면 1~2년 다른 걱정 없이 아이템만 보고 달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정도 준비 없이 외주 했다가 아이템 했다가 하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를 받아서 아이템에 올인하든지, 아니면 외주에만 전념해서 몇 년동안 돈을 많이 벌어놓든지 둘 중 하나다. 근데, 사실 내가 이콜레모를 창업한 이유는 뭔가 아이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내가 다닐 만한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다닐 만한 회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외주 업체로 성장해 나가는 시나리오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

 

근데 그렇게 결심한지 두 달 만에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돈만 보고 달리기로 결정해놓고 당장의 현금 관점에서는 가장 보상이 낮은 쪽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카카오에서 제시한 조건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근 1년 간 받은 오퍼 중에는 가장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반된 결정을 내린 이유. 첫째는 드림팀 재결성이다. 내가 오픈마루 다닐 때부터 줄곧 생각해오고 말해왔던 거지만, 난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일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일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검증된 드림팀이 다시 뭉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매력적인 기회였다. 이 드림팀은 티몬에서 결성되었던 팀이다. 티몬이 가장 가파른 성장을 했던 2010년 겨울부터 2011년 봄까지, 6개월간 그 폭풍 같은 성장을 불과 다섯 명으로 버텨냈었고, 내가 들어갈 때만 해도 밤 12시만 되면 다운되던 사이트였지만 2개월 만에 다른 경쟁사들보다 높은 성능과 안정성을 이뤄냈고 그때까지만 해도 더 복잡한 비즈니스 로직을 커버했다. 그 멤버들이 그대로 다시 뭉치고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드림팀, 채팅촌을 함께 개발했던 팀(티몬 드림팀과 교집합이 많다)이 붙고 이제 갓 신입이지만 이미 한 사람 몫을 하기 시작한 내 동생까지 합류해서 7명이 함께 카카오에 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좀 놀라웠던 것은 카카오에서 이렇게 팀으로 들어오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팀 그대로 들어오라는 제안은 많았지만 대부분 팀을 그냥 옵션 정도로 생각하는 느낌이었다면, 카카오는 팀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팀으로 들어가면 그 멤버를 뿔뿔히 흩어놓는 게 아니라 그 멤버 그대로 일하게 한다. 그게 가장 카카오에서 생산성이 좋았던 인재 흡수 방법이었다는 것. 합리적이지만 한국에 정말 이렇게 하는 회사는 흔치 않다.

사실 티몬에서 나온 이후에도 그 개발팀 멤버들을 지속적으로 만났고, 어떻게든 다시 뭉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콜레모의 역량 부족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데 이제 정말 기회가 생긴 것이다. 꼭 팀 인수라는 제안 형태 뿐 아니라, 카카오가 대부분의 개발자들에게 매력적인 회사라는 점도 우리 팀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만일 나만 카카오에 끌려하고 다른 사람들은 별 매력을 못 느낀다면 조건이 되도 팀 결성이 안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더욱 카카오가 끌렸다.

카카오 외에 다른 한 곳에서도 비슷하게 매력적인 제안을 받긴 했다. 그것도 딱 하루 늦게. 그것도 내가 신뢰하는 분에게서 받은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아마 반대로 하루가 빨랐다면 결정이 달랐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이콜레모에서 채용할 때 지섭이가 말했던 것처럼 인사에서 제일 중요한 건 운때가 맞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두번째 이유는 기회의 크기다. 이건 결국 두 달 전의 결정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카카오의 미래가 밝다면 돈이라는 관점만 따져봐도 카카오에 가는 것이 이득이다. 2년 전부터 카카오를 유심히 지켜봐왔고, 내부는 잘 모르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형태는 린 스타트업에 아주 가깝다고 생각했다. 특히 2개월 2명 서비스 개발이라는 방식을 들었을 때 참 괜찮다고 생각했었고, 카카오톡의 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좋은 회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초기 멤버 중에 내가 아는 사람도 많고, 중간에 들어간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카카오에 미팅하러 갔을 때 아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는데, 하나같이 빨리 입사하라고 했다는 것. 이런 회사 흔치 않다. 아니, 처음이다. 삼성도, SK도, KT도, NHN도, 오픈마루도 그렇지 않았다. 말하자면 직원들의 NPS가 엄청 높은 회사라는 것.

근데, 사실 그것보다 더 나에게 크게 느껴졌던 것은 전략적인 관점이다. 예전에도 트위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난 SNS의 미래는 페이스북이 아니라 MIM이라고 생각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MIM이 페이스북을 추월할 것은 틀림 없다. 그게 카카오톡이 될지 라인이 될지, 혹은 위챗이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한국 기업으로 페이스북과 싸워서 이긴다... 생각만 해도 엔지니어로서 흥분되는 일 아니겠는가? 구글의 엔지니어들도 빠져나가서 페이스북으로 가는 세상인데 말이다. 페이스북도 다분히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는 듯 하고, 그래서 페이스북 메신저를 계속 강화하면서 MIM의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고, 그게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카카오톡과 라인이 보여준 기민함이 페이스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위챗은 사용자는 많지만 아직 여러 면에서 뒤쳐져 있는 것 같고 결국 경쟁은 카카오톡과 라인일 텐데, 기왕이면 개발자 생태계를 살리는 방향인 카카오톡을 등에 업고 싸우는 편이 신나지 않겠는가. 카카오톡이 페이스북을 이겨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사실 내가 카카오 들어간다고 하니까 거긴 이미 들어가긴 늦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이미 클만큼 큰 회사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물론 2~3년 전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 이상으로 앞으로의 가능성이 더 큰 회사다. 그러니까, 나는 카카오를 카카오톡이라는 아이템을 성공시킨 회사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스타트업이라는 관점으로 본다. 실력과 자본, 괜찮은 플랫폼을 가지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해볼 수 있는, 약간 좋은 출발점에 선 스타트업이라는 것이다. 결국 스케일의 문제다. 1.0 스케일로 보면 지금까지 카카오가 이룬 것도 워낙 크니까 늦은 것 같지만 0.1 스케일로 보면 출발점에서 약간 앞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근데 그 약간 앞서 있는 그 부분, 그게 바로 이콜레모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카카오에 입사한다는 느낌이라기보다, 우리 팀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투자를 받았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거기에 덤으로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카카오톡이 이만큼의 성공을 이뤄내기 전에 들어가는 것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요약하면 드림팀 재결성, 세계 정상급의 IT 회사와 맞붙어볼 수 있는 기회, 이 두 가지 때문에 카카오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

 

이콜레모를 포기하는 게 아쉽지 않았냐고? 당연히 아쉽다. 사실 이대로 외주 중심으로 해나가도 당분간 돈 벌 거리는 쌓여 있고, 지난 두 달간 한 프로젝트도 계속 계약연장 하자는 거 힘들게 거절해놓은 상태다. 작년에 돈 떨어졌던 멤버들도 다시 재합류했거나, 재합류 예정이다. 채팅촌도 아직 몇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게 보이고 있고. 카카오가 대단히 수평적인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이콜레모만큼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조직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 이렇게 내 맘대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접는다는 게 마음이 좋을 리는 없다. 벤처기업이 실패하는 건 1년 만에 실패하지만 성공하는데는 7년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5년을 해왔으니 2년만 더 버텨볼까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콜레모를 내가 창업한 이유를 떠올려보면 또 굳이 이콜레모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난 내가 다닐 만한 회사가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오픈마루도 내가 다닐 만한 회사는 아니었기에 오픈마루 퇴사자 1호 지섭이와 3호 내가 나와서 창업한 거다. 근데, 카카오는 내가 다닐 만한 회사인 것 같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 굳이 이콜레모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카카오에서 즐겁게 일하면서 더 좋은 회사로 키워나가면 되는 거지.

아뭏든 난 지금 카카오에서 일할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다. 입사일은 3월 4일. 하지만, 축하한다는 말은 되도록 안 들었으면 한다. 이콜레모를 접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축하를 받으면 서글프다.

Youngrok Pak , 11 years, 2 months ago

일기장/2012-12-19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부산까지 투표하러 갔다온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집권당이 그 많은 악행을 저질러도 끝없이 용서해주는 관대한 국민.

이번에 정말 뼈저리게 느낀 건, 우리나라의 수구층이 정말 굳건하다는 것이다. 난 정말 빨갱이가 아직도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이 내 가까이에 있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얼마나 정보들이 전달이 안되면 그런 걸 믿을까? 솔직히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이래저래 생각을 해봤다. 과연 앞으로 이 수구층 무너질 날이 올까. 이게 정말 노인과 젊은이의 대결이라면 한 20년 후에 지금 노인들 다 죽으면 수구세력이 무너질까? 이런 관점으로 생각을 해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닐 것이다. 우선, 이 수구세력은 지역에 기반하고 있다. 영남지방에 살면서 지식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자라나는 젊은이들은 부모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밖에 없다. 나도 고등학교 때 부모님 얘기를 들으면서 김대중이 대통령되면 나라 망하는 줄 알았다. 심지어, 대학 때도 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고 이회창이 대통령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역사를 공부하면서부터였다. 대학 때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을 접하면서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어째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일본에 앞선 문명을 갖고 있었으면서 일본이 저렇게 변혁해나갈 때 조선은 그러지 못했는가. 궁금했다. 그래서 일본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메이지 유신에 초점을 맞췄는데, 하다보니 그 이전 도쿠가와의 시대, 전국시대 등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알게 된 건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일본에 앞섰었다고 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그동안 국사를 배우면서 중국의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달되는 이미지를 너무 강하게 받아서 그런지 일본이 예전에는 후진국이었다가 근세에 와서 앞지른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반도가 앞섰던 건 삼국시대, 고려시대 중기 정도지, 항해 기술이 발달하고부터는 오히려 종합적인 면에서 일본이 더 앞섰다.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다. 어쨋든 일본과 조선의 격차가 있었다고는 해도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는가. 일단 메이지 유신을 배우면서 그래도 일본의 동력은 어느 정도 이해했는데, 왜 조선은 그러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사부터 공부하기 시작했고, 교양 강좌를 이것저것 들으면서 지식을 쌓았다. 그러다가 권일이를 통해 강준만씨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고, 때마침 한국 현대사 산책이 출간되었다. 정말 궁금했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자료에 목이 말라있던 나에게 이건 단비와 같았다.

그리고, 이걸 읽으면서 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박정희 전후의 역사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았고, 한국 독립사에 대해 우편향적으로 쓰여진 역사서 밖에 읽지 못했던 터라, 한 줄 한 줄이 충격과 공포였다. 읽다가 눈물을 흘린 것만도 대여섯 번. 그제야 선거 때마다 전라도는 죄다 민주당 찍고 경상도는 죄다 한나라당 찍는 게 단순한 지역 편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위에 가족을 잃은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 학살자의 집단을 투표로 뽑을 수 있겠는가.

3당 합당도 정말 어이 없는 사건이다. 군부 세력과 투쟁하던 김영삼이 자신의 집권을 위해 3당 합당을 하고 나니 그렇게 서로 물고 뜯고 싸우던 김영삼 지지 세력과 군부 지지 세력은 합심해서 민자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은, 현재의 새누리당은 이 민자당의 후예이지만 군부 세력은 김영삼의 배신(?)으로 많이 축출되었고, 실질적으로 김영삼의 후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 노태우 정권을 지지하면서 김영삼 지지세력을 벌레보듯 하던 사람들이 뻔히 지금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이 실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뭐, 열거하자면 한이 없겠지만, 아뭏든 한국 현대사에 대한 공부가 깊어갈수록 한나라당이 다시는 집권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집권하면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들을 낱낱이 까발려서 심판해야 한다.

이게, 부산에서 태어나서 평생 한나라당 지지하는 의견만 듣고 자란 사람이 한나라당 비판 세력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나마, 나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배울 때도 양쪽 입장에 서 있는 교수를 다 만날 수 있었고, 양쪽 의견을 고루 접할 기회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비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남에서 태어나서 타 지역으로 가지 않고 평생 사는 젊은이들을 생각해보자. 과연 나처럼 다른 생각을 접할 기회가 있을까? 나 역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한나라당 지지자였을지 모른다. 그나마 서울로 유학갈 기회라도 잡은 애들은 좀 낫겠지만, 계속 태어난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다른 생각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인터넷도 별 다를 바 없다. 자기 주변 사람들이 가는 사이트에 가고, SNS도 주변 사람들 중심으로 할 테니 다른 의견은 역시 접할 수 없다. 이미 새누리당 알바들이 장악한 포털에 가면 그게 진짜인 줄 알 것이고.

그래서, 영남지역의 수구층은 대물림된다. 20년 후가 되어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럼, 그래도 엎치락뒤치락한 전력이 있는 지역들, 혹은 야당 성향의 지역들은 시간이 지나면 젊은이들이 수구를 멀리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도 희망적이지 않다. 취업난 때문이다. 수구 세력의 마인드에 동조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취직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사회 안전망이 없는데 무작정 창업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20대들은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수구 세력의 마인드에 동조해야만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일자리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낮다. 중소기업이 커 나가야 일자리가 늘어나는데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로 중소기업이 하나 둘씩 망해가는데 일자리가 늘어날 리 없다. 화장실도 못 가고 하루종일 서 있어야 하는 이마트 계산대 직원 같은 일자리나 늘겠지. 이런 젊은이들의 생활고가 분노가 되어 정치권을 향한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이들에겐 분노도 사치다. 분노해서 거리에 나가 시위하다가 짤리면 어쩌려고. 결국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든 합리화하면서 살게 마련이다. 사람은 잃을 것이 없을 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잃을 게 있다면 오히려 분노보다는 굴종을 선택한다. 그래서, 설령 20대의 투표율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그 힘이 그리 엄청나진 않을 것이다.

또 하나는 언론이다. 노무현 때의 패배를 열심히 분석한 새누리당은 언론 장악이 키워드라고 보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공정한 보도를 해주던 MBC와 YTN을 장악하면서 TV에서 정권 비판 목소리를 거의 완전히 제거했다. 엉뚱하게도 요즘 SBS가 그나마 약간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한겨레와 경향은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조중동에 비하면 영향력이 미미하다. 그리고 댓글 알바로 인터넷 포털도 장악했고, SNS에도 일부 침투하고 있는 상황. 실질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접하는 대부분의 매체가 친 새누리당이 된 것이다. 그리고, 조중동도 예전처럼 투박하게 선동하는 게 아니라, 아주 교묘하게 선동전을 펼친다. 스스로 합리적인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세뇌시키고 있다. 그런 반면 지금 SNS를 지배하고 있는 진보의 목소리는 주류 미디어로 전달이 되질 않으니 SNS를 폭넓게 쓰는 사람이 아니면 수구편형된 언론 밖에 접할 수 없는 것이다.

나꼼수가 무려 천만명이 다운로드를 받아서 봤지만, 나꼼수를 한 번도 안 들어봤거나, 들어보자마자 내용도 안 듣고 그들의 말투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2천만이다.

정리하면, 1) 영남지역의 수구 성향은 대물림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으며, 2) 젊은이들은 생존에 목매여서 진보에 귀기울일 여유가 없고, 3) 언론이 장악 당해서 뉴미디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수구로 기울게 된다는 것.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가면 5년 후에 안철수가 되기는 커녕 정몽준이나 오세훈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되는 시간이 또 올 거라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세력이 줄어드는 그 날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뭔가 대변혁을 일으킬 만한 게 없다면.

난 그래도 나꼼수가 그 대변혁을 일으킬 만한 그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이 사태를 어쩌지 못한다는 게 정말 믿기 어렵다. 그 이상으로 뭔가 더 대단한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긴 한 것인가. 나꼼수의 노력이 정말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 창의적인 무언가를 찾아내지 못하면 답이 없다는 거, 이게 현실이다.

노무현 때만 해도 정말 난 더 이상 정치에 관심 안 가져도 되리라 생각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되었고, 노무현이 탈권위도 상당히 이뤘고, 과거의 올바르지 못한 역사도 상당히 많이 바로잡았다. 그래서 이명박이 되어도 민주화의 뿌리는 흔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명박과 새누리당은 이 나라의 언론 자유의 수준을 가나 수준으로 끌어내렸고, 트위터에 농담 잘못했다고 처벌 받는 시대가 되었다. 더 후퇴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지금보다 훨씬 더 후퇴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후퇴로 가득하다. 로마의 민주정이 있었던 그 나라에 중세 암흑시대가 왔고, 무솔리니가 등장했다. 박정희 시대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대단히 높다.

더 암울한 것은, 그런 상황이 되면 진보 성향의 능력 있는 사람들은 한국을 바꿔보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더 좋은 나라로 떠날 거라는 점이다.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다른 곳에 있는데, 뭐하러 굳이 힘들게 투쟁해가면서 나라를 바꾸려고 하겠는가.

나도 아마 이 나라가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선다면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내 자식에게 다른 사람이 굶어죽든 말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고 가르칠 생각은 추호도 없고, 그런 나라에서 살게 하고 싶지도 않다.

정말 우울한 밤이다.


 

블로그 / 정치

Youngrok Pak , 10 years, 5 months ago

일기장/2012-12-14

간만에 근황 토크.

올해 중순, 이콜레모는 자금 부족으로 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일시 휴직 상태에 들어갔다. 올해 초부터 이콜레모는 채팅촌을 만들어 서비스를 하면서 자체 아이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대략 4~5개월 정도 서비스하다보니 어느 정도 먹히는 부분이 있다는 판단은 섰는데, 추진력을 한창 내야 할 시점에 돈이 떨어졌다. 그래서 투자를 받으러 다녀봤으나, 소프트뱅크 벤처스는 점심 먹으면서 한 시간 이야기하는 정도의 기회 밖에 주지 않았고, 케이큐브 벤처스는 소개를 통해서 그런지 상당히 깊이 있게 들어주었지만, 어쨋든 투자는 불발되었다. 멤버 중 나는 와이프 버프로 버틸 수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멤버들이 남아 있으려면 어쨋든 외주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제까지의 이콜레모의 역사 때문이다. 이콜레모는 그동안 외주를 해서 돈을 벌고, 돈이 좀 모이면 자체 아이템을 시도하는 쳇바퀴를 돌았는데, 이렇게 흐름이 끊기니까 당연히 좋은 결과를 생산해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템이 프로토타입 수준에 머물렀고, 시장에 제대로 출시했다고 말할 만한 아이템은 작년 말부터 올해 중순까지 8개월 간 출시한 채팅촌과 포토 리사이저 밖에 없었다. 그 8개월을 만들기 위해 외주를 한 시간은 무려 2년.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외주를 시작하면 지난 이콜레모의 역사를 반복하는 꼴이 된다. 그동안 뭘 잘못했는지 알면서 또 그 과거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외주를 해야 한다면 외주 전문 업체로 변신하기. 시간 벌기용 외주는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외주 업체로 회사를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이콜레모는 영업력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는 이름이 좀 있어서 일거리가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티몬에서 악명을 날린 후로 일거리가 들어오다가도 내가 레퍼런스 체크해보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연락이 끊긴다. 그러니 내가 일거리를 따올 수 있는 경우는 레퍼런스 체크가 뭐예요?하는 팀이나, 나는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안 믿겠어 하는 스타일의 팀 뿐이다. 이런 일들은 대개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나 혼자는 그럭저럭 잘 벌 수 있겠지만, 회사를 키워나가는 비전을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내 스타일 상, 프로젝트를 하면서 내내 클라이언트랑 싸우기 때문에, 잘 끝내줘도 좋은 소리를 듣는 경우는 드물다. 후속 일거리 제안이 오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그건 대개 우리가 돈 적게 받고 일했던 경우여서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돈 다 떨어지고, 사무실 보증금까지 빼서 정말로 잔고 0이 되고, 내 개인 돈까지 다 쓸 때까지 한 번 버텨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파산 직전까지 가면, 그 때 깨끗하게 포기하자는 거였다. 실패를 깨끗이 인정하고, 나중에 다시 창업을 하더라도,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 태근이는 좀 아쉬워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줬고, 성원씨는 이렇게 결정이 나는 과정 자체에는 나에게 공감했다. 그래서, 일단 다른 멤버들은 이콜레모에선 휴직 상태가 되었고, 다른 곳에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섰다. 팀이 흩어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돈을 다 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개월? 사무실을 뺼까 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사무실을 빼봤자 2~3달 정도 차이 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이제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사 깨달은 거지만, 스타트업이 자기 아이템을 소신 있게 추진하려면 적어도 일년, 넉넉하게 본다면 2년 이상 돈 한 푼 벌지 않아도 자기 삶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된다. 물론 자기 돈도 많이 쏟아부을 수 있다면 더 좋다. 하지만, 꼭 돈이 많지 않더라도, 어쨋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만큼 재정 상황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적어도 핵심 창업자들은 그런 상황이어야 뭔가 해낼 수 있다. 5년이나 걸렸으니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다.

그래서, 이제 돈 벌기 모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다시 일거리도 찾으러 다니고, 예전엔 다 씹었던 CTO 자리 제안도 가서 미팅해보고 그랬다. 그러다가 일거리를 하나 물었는데, 마침 그때 쯤 케이큐브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나에 대해서 좀 찾아본 모양인데, 악평이 많은 것은 충분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뭔가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 딱 들었을 때 내가 생각난 건 네이버 웹툰 담당자의 말이었다. 네이버 웹툰 담당자가 말하기를, 자기 임무는 재능 있는 만화가들이 포기하기 전에 발굴해내는 것이라고. 대단히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외주를 시작한 후라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이 때 계약도 안했었는데 그냥 확 끊어버렸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뭐 잘못 판단한 걸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다행히 외주 끝날 때까지 기다려준다고 해서 일단 차분하게 외주를 진행했는데, 또 이게 뜻대로 안되었다. 팀원들이 늘 외주할 때 내가 커뮤니케이션 전면에서 나서면 망친다고 그래서 이번엔 커뮤니케이션을 을에게 맡기고 나는 완전히 개발에만 전념하기로 했는데,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좀 문제가 있었다. 외주를 할 때 매니저가 해야할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과 개발자가 할 수 있는 분량 사이에서 적절하게 범위를 잡는 것이다. 근데 이게 잘 안되었다. 이게 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다들 알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서 못 참고 프로젝트를 드랍하기로 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이콜레모에서의 지난 외주들을 좀 돌이켜봤는데, 난 이제 팀원들이 나의 협상력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좀 반박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클라이언트랑 늘 싸우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 팀이 해낼 수 있는 범위로 협상을 해냈다. 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 협상을 맡겼을 때는 범위 협상이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특히 우리가 병이 되고 을에게 맡겼을 때는 항상 최악의 상황이 왔다. 오히려 내가 싸우는 부분은 내가 일 더 해줘가면서까지 클라이언트의 잘못된 기획을 뜯어고치려 했던 것들이고, 일을 줄이는 협상은 매끄럽게 잘 된 경우가 꽤 많았다. 

아마 입장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어쨋든 우리 팀에서 개발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가는 나와, 다른 회사에 그냥 개발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을이 갑에게 같은 협상력을 발휘할 리는 없다. 

 

아뭏든 일이 꼬이고 꼬여서 결국 돈 벌려고 했던 일인데 돈 한 푼 못 벌고 시간만 무려 6개월을 날리는 엿 같은 상황이 되버렸다. 사실 이 프로젝트가 똥이 될 거라는 건 계약 전부터 이미 많은 냄새가 났는데, 워낙 돈이 급한 상황이다보니 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 그렇다. 이것도 이콜레모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일이다. 이콜레모가 자금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외주를 했을 때는 예외 없이 좋지 않은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어쨋든 이것도 나에겐 중요한 교훈이 되었고, 그 교훈 덕분에 몇 달 전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심각한 지금은 일거리를 올바르게 선택하는데 성공했다. 두 건 계약해서 하고 있는데, 둘다 금액이 그리 크진 않아도 내가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아, 그리고 외주 끝나고 나서 다시 케이큐브 벤처스와 이것저것 대화가 오갔는데, 그 4개월 사이에 뭔가 상황이 변했는지, 4개월 만의 첫 미팅부터 이미 대화의 온도가 달라져 있었다. 이래저래 스토리들이 더 있었지만, 아뭏든 이번에도 투자는 불발. 그래도 이번엔 투자를 위해서 내가 할 수있는 건 다 해봤기 때문에 후회가 남지 않는다. 확실한 거 하나는, 지금의 나는 일반적인 VC에게 투자를 받기에는 투자 부적격이다. 이 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앞으로 무의미한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서 상당한 수확이다.

 

아뭏든, 포기했다가 다시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 불발인 상황이므로, 나의 결론은 희망을 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간다. 돈 벌기 모드로 가는 것. 그럼 이제 외주를 할 수 밖에 없고,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말 충분한 돈을 벌기 전까지는 자체 아이템은 시도하지 않고 외주에 전념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제 확실히 결론을 내렸다.

고민거리는 다시 흩어진 팀을 모을 것인가 아닌가. 트위터에 일거리 구한다고 홍보한 이후로 일거리 제안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지만, 계약까지 간 건 둘 뿐이다. 물론 팀이 다시 모여서 준비된 상태였으면 좀더 적극적으로 해서 더 계약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회사의 성장을 바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여러 사람 감당할 만큼 일을 끌어올 자신이 없다. 그래서 고민 중인데, 이건 아무래도 다들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듯.

 

어쨋든 올해 야심차게 진행했던 채팅촌은 실패하고, 투자도 될듯 말듯 하다가 실패, 4개월을 쏟아부은 외주는 돈 한 푼 못 건지고 오히려 앞으로 2개월 더 일한 돈까지 쏟아부어야 할 상황, 결국 올해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올해에 내가 이런 일들로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이 모든 게 헛수고일 것이고, 내가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면 앞으로 뻗어나갈 힘이 될 것이다.

그럼 올해 내가 얻은 교훈들은 뭘까. 정리하면 이 정도인 것 같다.

  • 스타트업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 동안 돈 한 푼도 벌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재정 상황이 되어야 한다.
  • 돈이 없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 외주 협상은 내가 직접하거나,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맡긴다.
  • 계약서를 복잡하게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회사랑은 계약하지 않는다.
  • 내 이름은 명성에서 악명으로 바뀐지 오래되었다. 실력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 불공평한 계약을 참아가면서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건 확실한데, 나에게는 그걸 참을 능력이 없다.
  • 인재를 구할 때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 VC의 투자는 투자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받을 수 있다.

1년을 날린 교훈치고는 좀 부족한 감이 있긴 하다.

 

암튼, 이제 당분간은 외주만 한다. 외주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은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약간만 더 까칠해졌다. 금액을 되도록 양보하지 않고, 사람 중요한 줄 아는 회사랑만 계약한다는 것. 그 판단은 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자기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이번에 내가 하기로 결정한 일도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기 팀원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을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리 없다. 이게 내가 티몬을 나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로 위에 언급한 똥밟은 프로젝트의 경우도, 갑 쪽에 프로젝트 리딩을 맡았던 사람이 프로젝트 드랍 문제로 짤렸다. 

근데, 외주만 하기에는 분명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서 약간은 활동을 더 하기로 했다. 하나는 생산성 도구 만들기. 여러 회사의 외주를 하다보면 나 자신의 정보 관리가 매우 중요해진다. 계정도 여러 군데 많아지고 할 일도 엉키기 쉽고, 일정도 엉키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내 정보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도구들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조금씩 사업화를 엿볼 것이다. 또 하나는 오픈소스 활동. 외주를 하면서 쌓이는 코드들을 조금씩 오픈소스로 만든다. 어쨋든 다 외주에 도움은 되지만 한발짝씩 나가서 뭔가 축적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외주를 중심으로 일하고, 외주 일을 하면서 쌓이는 노하우들을 좀더 확장성 있는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 이게 현재 이콜레모의 전략이다.

 

 

 

Youngrok Pak , 11 years, 4 months ago

일기장/2012-11-06

지금 내 블로그를 돌리고 있는 바로 이 위키그로브를 만들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본다.

목표

내가 위키그로브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쓰기 위함이었다. 하나는 내 블로그를 내 맘대로 활용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팀에서 쓸 위키를 만드는 것. 모인모인도 역할을 잘해줬지만 엔드유저 대상으로 만든 게 아니다보니 귀찮은 점이 여러 가지 있었다. 계정 관리가 귀찮고, 플러그인 붙이려면 삽질이 좀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했다.

위지윅 

근데 여기까지만 하면 좋았을 텐데, 스프링노트의 경험이 있다보니 일반 사용자도 쓰기 쉽게 만들고 싶었다. 사실 개발자란 종족이 따로 있는 게 아닌지라, 일반 사용자에게 불편한 건 역시 개발자에게도 불편하다. 아무리 텍스트를 가지고 노는 직업이라고 해도 위키문법으로 글을 쓰는 것과 WYSIWYG으로 글을 쓰는 것의 차이는 크다. 특히 긴 글을 쓸수록 위키문법은 불편하다. 무엇보다 가장 넣고 싶었던 기능은 스프링노트에서 내가 제안하고 특허까지 받았던 기능, 링크 걸 때 페이지를 추천해주는 기능이다. 스프링노트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이 기능만큼은 정말 너무 편했고, 꼭 가져오고 싶었다. 물론 이건 위키문법으로도 구현 가능하지만, 위키문법을 쓴다는 건 에디터를 기본 textarea로 써서 오류 가능성을 줄이고 페이지를 가볍게 한다는 장점이 있는 건데, 이런 기능을 넣게 되면 결국 스크립팅을 해야 해서 위키문법을 쓰는 장점이 많이 사라진다. 그래서, 어차피 가볍고 심플한 위키문법의 장점을 살리지 못할 바에야 처음부터 위지윅 에디터로 가자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위지윅 에디터로 가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는 플러그인 기능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키를 개발하는 핵심 이유가 쉽게 플러그인을 개발하고, 또 붙이기 쉽게 하는 것인데, 그러자면 역시 에디터에 뭔가는 손을 봐야 한다. 이래저래 에디터에 기능이 많이 붙을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위지윅이 유리하다.

물론, 스프링노트 때처럼 에디터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TinyMCE나 CKEditor가 충분히 안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다소 판단이 틀렸던 것 같다. 일단 맥에서는 제대로 안되는 게 많았다. 따지고보면 큰 문제들은 아니지만, 에디터를 손보려면 꽤 깊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기능들이 중요한 상황에서 이 컨텍스트 전환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결국 위키그로브의 품질에 꽤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 부분은 아직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 중이다. CKEditor 4 베타가 나왔는데, 이걸 써봐야 할지, 아니면 redactor를 구매해서 쓸지 고민 중이다. 품질을 평가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큰 일이라는 것이 문제다. 아마 당분간은 현재 그대로 두고 필요한 것만 수정해가면서 가지 않을까 싶다.

이 문제 때문에 Markdown도 심각하게 고려해보았다. Markdown은 위키문법보다는 텍스트 상태에서 좀더 봐줄만하다. mou처럼 사이드에 프리뷰를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역시 위의 이유들을 고려하면 위지윅보다 나은 대안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지윅은 아마 포기하지 않을 듯 하다.

플러그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플러그인. 예전에 유상민 씨와 잠깐 같이 일할 때 MoinMoin 쓰는 걸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플러그인을 업로드하는 것만으로 동작하도록 세팅해서 자유자재로 플러그인을 추가해가면서 쓰고 있었다. 가히 MoinMoin Master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그냥 나도 저렇게 MoinMoin을 쓸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MoinMoin의 다른 단점들이 간단한 게 아니고 또 느렸기 때문에 그 방식 그대로 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플러그인을 아주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나온 것이 아예 위키 페이지에서 코딩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도 사실 스프링노트를 만들 때부터 조금씩 다듬어오던 것이다. 그 때는 자바스크립트로 하려고 했었다. 위키 페이지에서 바로 코딩하고 저장하면 바로 동작하는 것. DB는 요즘 Document Storage류의 NoSQL처럼 위키 페이지를 Document Storage처럼 쓰면 된다. 이게 서비스로 나온다면 이제 웹 프로그래밍을 하기 위해 Rails고 Django고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냥 가입해서 페이지를 만들고, 페이지에서 바로 코딩해서 저장하면 바로 동작하는 웹 어플리케이션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Programmable Wiki라는 컨셉을 만든 것이다. 위키 페이지에 바로 파이썬 코드를 넣을 수 있고, 위키 페이지를 열면 파이썬 코드가 바로 실행된다. 그럼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컨셉이 위키그로브에 들어갔다.

템플릿 엔진

이게 되려면 위키 페이지를 편집할 때 코드를 삽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결국 JSP나 PHP 같은 문법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Mako다. 언젠가 내가 템플릿 언어의 종류를 분류한 적이 있었는데, 템플릿 언어를 선택할 때 고민 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1. HTML을 그대로 쓸 것인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마크업 언어를 도입할 것인가.
  2. 템플릿 상속을 할 것인가, 외부에서 레이아웃을 주입할 것인가.
  3. 프로그래밍 언어를 살릴 것인가, 템플릿 전용 언어를 만들 것인가.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1번에서 전자에 속하는 건 PHP, JSP, erb, django template 등이다. 후자는 Haml 류, markdown, 위키문법 등이다. 2번에서 전자는 Mako, Cheetah template, django template등이고, 후자는 Rails의 layout이나 SiteMesh 등이다. 파이썬 템플릿 언어들은 대부분 템플릿 상속을 선택하고 있다. 3번에서 전자는 PHP, JSP, Mako, Cheetah template 등이고, 후자는 django template, velocity 등이다. 그러니까 템플릿 언어를 선택할 때는 이런 분류를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한다.

나는 1번의 경우는 후자의 장점을 꽤 체감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여전히 전자가 좋다고 보고, 2번과 3번은 확실하게 전자를 선호한다. 2번에서 전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명시성과 유연성. 이를테면 Rails의 경우 Rails의 layout 시스템을 알지 못하면 백날 view를 들여다봐도 이게 어떻게 조립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django template은 템플릿 파일 하나만 열어봐도 어떻게 조립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3번의 경우는 Cheetah  template이나 Mako 개발자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파이썬은 이미 충분히 좋은 expression language다. 자바는 기본 문법이 verbose하니까 어쩔 수 없이 EL 같은 거 만들어서 쓰지만 이미 충분히 간결한 문법을 가진 파이썬, 루비, 자바스크립트에서 그럴 이유는 없다. 물론 django template은 view에서 복잡한 로직이 들어갈 필요가 없으니 제한한다고 말하지만, view도 리팩토링이 필요하고 programmability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도입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이유도 아니다. 그래서, 파이썬 같은 언어에서 django template처럼 설계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모독이다!

암튼, 이런 기준으로 걸러보면 남는 건 거의 Mako 밖에 없다. Cheetah도 문법이 참 맘에 들고 좋지만, 아쉽게도 jQuery랑 충돌한다. 예전엔 Cheetah가 더 많이 쓰였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Mako가 좀더 널리 쓰이는 것 같다. 그래서, Mako를 도입하기로 했다.

코드 에디터

웹 페이지에서 바로 코딩이 가능한 위키니까 에디터에서 코딩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냥 텍스트로만 코딩하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코드 에디터스러운 기능들을 추가하고 싶었다. 다행히 CodeMirror라는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고, 이걸 붙여넣을 수 있었다. 덕분에 위키그로브는 무려 웹에서 syntax highlight된 코드를 보면서 코딩할 수 있는 위키가 되었다! 여러 가지 code assist 기능도 추가하려고 잔뜩 계획해놓고 있었다는.

테마

템플릿 상속이 가능하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테마를 자유자재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키그로브에 헤드 편집이 따로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다른 템플릿을 상속하도록 지정할 수 있는 것이다. Mako 코드를 직접 편집해서 할 수 있다. 그리고 BaseTemplate 자체를 수정해버리면 한 번에 사이트 전체의 테마를 바꿀 수도 있다. 기술적으로는 세상 어떤 CMS보다도 진보적인 테마 적용 기술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실제로 쓰기에는 역시 너무 어려웠다. 이것도 나의 욕심이 과했던 부분 중에 하나. 

Fork

또 하나 정말 넣고 싶었던 기능은 Fork다. github이 Fork로 흥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위키페이지를 Fork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위키그로브는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위키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플러그인을 아주 쉽게 내 위키로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까 플러그인 마켓 같은 것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기능이 모두 안정되고 나면 이것이 폭발력을 일으킬 수 있는 기능이라고 본 것. 그러나, 역시 다른 기능들을 완성도 있게 마무리 짓는 게 너무 어려워서 보류 중.

보안

Mako를 쓰면서 가장 큰 문제는 보안이었다. 아무리 Programmability를 준다고는 하지만 나쁜 짓을 하거나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제한을 걸 필요가 있다. 특히 시스템 리소스는 막아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파이썬은 자바처럼 보안 모델이 언어 차원에서부터 설계된 언어가 아닌지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RestrictedPython 등등 여러 대안을 검토해봤지만, 일단 템플릿 언어에서부터 충분히 막아주지 못한다면 제대로 돌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결국 Mako는 템플릿을 파이썬 코드로 변환하고 컴파일해서 exec하는 방식인지라 Mako의 그 부분 코드를 수정하지 않는 이상 완전한 보안은 불가능했다. 이것이 내가 새로운 템플릿 엔진 lit-python을 만든 이유다. 하지만 성능이 다소 낮은 pyparsing으로 만든 거라 production에서 쓰기까지는 갈 길이 멀었고, 보안 기능을 추가해 넣는 것도 작업이 많아 결국 여기까지 하다가 위키그로브를 접게 된다.

사실 초반에 어느 정도 사용자를 확보하게 되기까지는 보안 문제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결국 언젠가는 해결해야 서비스로서의 가치가 있는 문제이고, 위키그로브로 수익을 내기 전에 이 문제가 닥쳐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버텨낼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결국 위키그로브를 접게 되었던 것.

목표했던 시장

위키그로브로 목표했던 시장은 굉장히 광범위하다. 일단 첫번째로는 스프링노트의 대체제. 그리고 테마와 플러그인 기능으로 노렸던 부분은 워드프레스와 드루팔이 먹고 있는 CMS 시장. 위키그로브가 이론대로만 구현된다면 On-site에서 모든 커스터마이즈를 할 수 있는 CMS가 된다. 드루팔의 경우 elance에서 프로그래머 일거리 개수가 1위로 올라오기도 할 정도로 파생 시장이 큰데, 이걸 위키그로브의 플러그인 마켓에서 흡수한다면 통행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programmability가 조금 더 강조되면 다음은 heroku나 webfaction을 노릴 수 있게 된다. heroku와 webfaction은 그야말로 웹호스팅과 deploy의 혁신을 보여준 사이트인데, 위키그로브는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모바일앱을 만들기 위해  Django를 로컬에 설치하고 개발하는 대신 그냥 위키그로브에 접속해서 페이지 하나 만들면 땡이다.

하지만 역시 노리는 시장이 너무 광범위하다보니 어느 쪽도 제대로 노리지 못했다는 것이 함정.

현재상황 및 계획

개발을 중단하긴 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기능이 이미 구현되어 버렸다. 소셜 로그인도 들어가서 로그인하기도 쉽고, 모인모인에서 가져오는 기능도 있고, 스프링노트에서 가져오는 기능도 있다. 서브페이지 기능도 있고, 실제 프로그래밍 기능을 활용한 게시판 기능도 플러그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실제 내 블로그는 모인모인 import로 가져와서 쓰고, 개발자 위키와 이콜레모 사내 위키는 스프링노트에서 import 해와서 쓰고는 있는데, 아직 완성도가 낮다보니 너무 불편하다. 원래 내가 쓰려던 목적보다 좀 심하게 오바하다보니 품질 관리가 안된 것이다. 역시 전형적인 Feature creep이다. 그렇다, 내가 멍청한 짓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짓을 나도 한 적이 있다.

덕분에 이걸로 바꾸고 나서 오히려 내 블로그에 안 들어가게 된 참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내가 쓰려고 만든 블로그인데 내가 불편해서 안 들어간다니;;

어쨋든 짬이 나는 지금 그래서 이걸 어떻게든 수술을 하려고 생각 중이다. 현재 생각하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1. 욕심을 싸그리 버리고 소셜 로그인과 Markdown 문법 적용한 가벼운 위키로 간다. 
  2. 위지윅만 보존하여 스프링노트의 대체제를 목표로 한다.
  3. 보안 문제 포기하고 현재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가되, github에 오픈소스로 공개해서 설치형으로 쓸 수 있게 한다.
  4. 설치형으로 하되, Markdown 문법 적용한다. 그럼 훨씬 빨리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매일매일 고민하지만 아직도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Youngrok Pak , 11 years, 5 months ago

일기장/2012-07-21

정말 간만에 블로깅 하나 해본다. 오늘의 주제는 망 중립성 논쟁.

망 중립성이 실로 해괴한 결말이 났다. 자세한 내용은  방통위 트래픽 관리안, 통신감청 허용 논란을 보면 되겠고, 아뭏든 망 중립성 논쟁이 촉발된 것이 무색하리만큼,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여튼 트래픽 제한 권한은 이통사에게 있다는 것이 핵심.

결과적으로는 이통사를 열심히 깠지만 이통사에 휘둘려 그들 뜻대로 되고만 격이다. 왜 휘둘렸다고 하냐면, 네티즌들이 이통사의 논리에 반박하는데만 초점을 맞추느라 핵심을 짚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통사들이 내세운 핑계들은 모두 진짜 이유가 아니다. 무임승차니, 트래픽 과다니, 일부 이용자가 트래픽을 과점해서 대다수의 사용자는 손해를 본다느니, 모두 가짜 이유에 불과하다. 어차피 대다수의 네티즌들은 트래픽 제한 조치 자체에 반대하는 포지션에 있기 때문에 일부만 저 핑계에 설득당해도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통사 직원들도 아마 대부분 그 주장들이 말이 안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임원 중 몇 명만 저 핑계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정도겠지.

그런데 네티즌들은 저 주장들이 터무니 없다보니 거기에 화를 내고 반박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느라 이통사들이 트래픽 제한을 할 수 있는 진짜 이유는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러니 방통위에서 저런 결론이 나는 걸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진짜 이유는 뭔데? 간단하다. 이통사가 구축한 망은 이통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신들이 구축한 망을 자기 맘대로 이용하는 걸 막을 수 있는 논리는 결코 간단치 않다. 트래픽 문제는 돌려 말하면 이통사의 이익을 최대화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인 거고, 이걸 막을 명분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는 없다. 

심지어, 네티즌들이 이통사들을 공격하는데 가장 많이 활용한 논리는, 내가 돈 낸 데이터 요금 내 맘대로 쓰는 게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이건 정확히 이통사들의 논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이통사가 투자해서 구축한 망을 이통사 맘대로 쓴다는데 니들이 뭐라고 할 건데? 이건 자폭이나 다름 없다.

물론, 이통사들이 이 논리를 대놓고 주장하진 못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런 주장을 했다간 앞서 가짜이유를 댄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욕을 들어먹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가짜 이유만 늘어놓고 있고, 네티즌들은 거기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또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다. KT나 SKT나 국가에서 주파수를 분배해주었고, 초기에 유형무형의 도움을 많이 준 것이 사실인데, 결국 국민의 세금이 들어간 거 아니냐, 그럼 국민에게도 재산권이 있으니 지들 맘대로만 해선 안된다고. 맞는 말이다. 근데, 여기서 그치면 그것도 곤란하다. 정부로부터 받은 게 그닥 많지 않은 LGT는 그럼 맘대로 해도 되는가? 주파수 허가가 필요치 않은 유선망을 구축한 지역 케이블 업체는 유튜브 트래픽 제한해도 되는가? 

그래서, 이 문제는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생각보다 거대 담론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문제의 이름도 망 중립성이고 난 참 괜찮은 명칭을 붙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더 문제를 제대로 드러낸다면 망 공공성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인터넷 망도 도로나 마찬가지로 공공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로도 공공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로는 국가가 건설하게 되고, 설령 민자 유치로 하더라도 그 요금을 민간 업체가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며 정부 및 지역사회와의 협의가 중요하다. 그래서 설령 민간 업체가 적자를 내면 세금으로 보전해주는 삽질을 하더라도 도로의 공공성은 충분히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맥쿼리가 나쁜 것도 이런 도로의 공공성을 해치면서까지 이득을 챙기려 하기 때문이고.

그런데, 인터넷망은 이 도로에 비해서 공공성이 덜 중요한가? 돈 있는 사람은 맘대로 망을 써도 되고, 없는 사람은 못 써도 되는 걸까? 아닐 것이다. 10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터넷망도 도로 못지 않게 공공재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사회가 자본주의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존재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공공성이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망 중립성 논쟁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싸울 게 아니라 공공성의 논리를 가져와야 한다. 그러니까, 공공재에 해당하는 사업을 하는 업체라면 그 업체의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물론, 이쯤되면 대한민국에서 빨갱이 소리를 들을 법한 주장을 하는 셈이고, 규제 때문에 기업이 발전 못하느니 어쩌느니 소리가 나올 것이다. KT나 SKT나 민영화되고 나서 경쟁하면서 발전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뭐 이미 지나온 역사니까 민영화 안했으면 어땠을지 잘 모르긴 하지만, 각종 민자도로나 KTX, 도시가스 등의 사례를 볼 때 민영화가 국익에 별로 기여하는 것 같아보이진 않는다. 여튼, 이 논쟁까지 가야 진짜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누가 옳을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어쨋든 이게 진짜 필요한 논쟁인 거다.

요컨대, 지금 겪고 있는 망 중립성 문제는 인터넷 산업의 문제라기보다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이고, 이걸 인터넷 산업 안에서 풀려고 해봤자 잘 안될 거라는 것이다. 카톡이 보이스톡 기상도 같은 거 들이밀고 이통사 까봐야 별반 도움 안된다. MB 정부 와서 신자유주의가 극도로 가속화되긴 했지만, 이건 꼭 MB 정부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 훨씬 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흐름에 휩쓸린 것이지.

그래서, 사실 나도 이렇게 답답한 소리를 늘어놓긴 하지만, 망 중립성에 대해 단기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은 없다. 단지 말하고 싶은 건, 이 문제가 니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통사의 헛소리만 까대면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거대 담론과 줄기차게 싸워야 하는 그런 문제라는 것이다. 인천공항 민영화를 막을 수 없다면 망 중립성도 못 지킨다. 

 

Youngrok Pak , 11 years,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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