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쓰기 귀찮은 글들.
일기장/2009-12-14
안드로이드 외주 용역 하던 거 끝내 재계약을 거절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 중에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일정도 여유 있고 우리 실력도 인정 받고 있고, 파견도 갈 필요 없다. 안정적으로 일거리도 줄 수 있는 회사다. 우리와의 계약 당사자인 회사도 좀 치사하게 돈 깎으려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어쨋든 돈도 제 때 주고 의사소통도 그럭저럭 원활했다. 근데 하기 싫었다.
나도 조건만 쭉 따져보면 괜찮은 것 같은데 왜 하기 싫은지 이상해서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제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사실 스트레스 받기로는 C&C와 프로젝트할 때가 더 심했다. 거기도 여기랑 똑같이 제품의 품질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완료하는데만 급급했고. 하지만 그 때는 실사용자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우리도 실사용자를 위한 기능을 기획하고 만들어주는 과정에서 작으나마 보람을 느꼈었다. 그래서, 다 참아가면서 프로젝트를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아무 보람이 없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 중에 실사용자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피드백도 받을 수 없다. 오로지 목적은 KT에 성공적으로 납품하는 것 뿐. 그러다보니 기획안은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기능으로 채워지고 어떻게 하면 화려하게 보일까만 고민한다. 이미 내려져 있는 의사결정들도 확인도 제대로 안해본 불확실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어서 계속 발목을 잡는데도 교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어떻게 이 제품의 품질을 위해서 노력할 만한 여지가 거의 없다. 우리도 이 정도로 심한 클라이언트는 처음 만나는 것 같다.
내가 처음 사회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것을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느낀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이런 게 싫어서 창업까지 했는데도 외주 용역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현실인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뭔가 모르게 내 마음 속에서 재계약 하지말라고 소리를 쳤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일로 인해서 꽤 괜찮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래왔던 안정적인 수입원을 제 발로 차버렸고, 실력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프로젝트 완료 전에 빠진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난 우리의 결정이 여전히 옳았다고 믿는다. 내가 만드는 제품을 내가 자랑스러워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보람을 느끼면서 일하는 것, 그것 때문에 창업한 것 아니겠는가.
사실, 이콜레모가 그 동안 돈을 밝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돈에 휘둘리기는 해왔다. 당장 사무실 임대료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도 있었고.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 우리가 만든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일기장/2009-11-29
닌자 어쌔신을 봤다. 사실 그닥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비의 헐리우드 데뷔작을 보고 싶었을 뿐. 물론, 난 액션 영화 좋아하지만 비가 액션을 잘할 꺼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비의 몸이야 뭐 수많은 매체에서 수도 없이 다루었으니 몸 좋은 건 알겠지만 액션이 몸 좋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당장 이소룡 같은 액션을 보여줄 리는 없겠지. 워쇼스키 형제의 능력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처음부터 예상을 한참 넘어서는 액션이 쏟아졌다. 검술 액션이 나오는 영화 중에는 최고로 꼽을 만하다.
이번 기회에 내가 본 칼싸움 나오는 영화 중에 재미 있게 봤던 것들을 꼽아본다면...
먼저 글래디에이터. 사실 고대 그리스 로마,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액션 영화들은 대개 액션이 시시하다. 비중도 낮고. 아무래도 중장보병 컨셉이 많다보니 전투가 재미있을 수가 없다. 이런 틀을 가장 먼저 깨뜨린 것이 글래디에이터가 아닌가 싶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역사나 스토리보다 액션과 연출에 힘을 기울였고 검투사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서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긴장감을 형성했다. 찌르고 베는 장면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장군 출신다운 전술 활용까지 선보이면서 이전까지의 비슷한 설정의 영화와 차원이 다른 액션을 보여주었다.
이런 글래디에이터의 액션이 유럽풍의 무거운 싸움이란 한계 내에서 극한을 보여줬다면 트로이는 그 한계를 벗어던졌다. 가벼운 갑옷과 방패, 그리고 점프 액션으로 현대적인(?) 액션을 고대 그리스의 전투에서 구현했다. 처음에는 점프하면서 거인을 쓰러뜨릴 때 경망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아킬레스의 점프는 결코 경망스러운 느낌이 아니었다. 이거 헥토르 위험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거기에 브래드 피트의 몸에서 흐르는 육체미도 내가 턱걸이를 다시 시작한 계기를 제공해주었다-_-
육체미를 강조한 액션의 극은 아마 300일 것이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육체를 너무나 강인한 느낌이 들게 잘 묘사했고 트로이나 글래디에이터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투와 전쟁의 중간 쯤 되는 느낌의 액션감을 잘 살렸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왔지만 죽는 사람보다 죽이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진 연출 덕분에 잔인한 느낌은 크지 않고 스파르타 전사들만 부각되었다.
화려하기로는 스타워즈의 광선검도 화려하고 이슈도 탔지만 사실 검술 액션의 느낌이 아니어서 별로 쳐주고 싶지는 않다. 반지의 제왕도 아라곤 외에는 별반 칼 제대로 쓴다는 느낌이 아니었고 판타지 설정이 없었다면 액션은 높은 점수를 못 받았을 것이다.
유럽식에 비해 중국식은 무협의 느낌이 가미되서 훨씬 화려하다. 칼도 훨씬 가벼운 칼이고 갑옷도, 방패도 없다. 와호장룡에서 두 여인의 대결이 아마 최고로 꼽을 만한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화려하고 빠른 액션인데도 긴장감은 좀 덜하다. 정작 베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다 막아내기 때문에 잘못하면 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죽는 것들도 열심히 싸우다 죽는 게 아니고 싸울 꺼 다 싸워놓고 어이 없게 죽는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300이 더 낫다.
반면 킬빌은 그 잔혹함의 인상이 강렬하다. 거침없이 베어버리는 액션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영화다. 여주인공의 칼솜씨가 뭔가 매끄럽지 않은 듯 하면서도 위력적으로 느껴진다. 일본 스타일의 칼싸움이다. 잘려진 팔다리들이 널부러진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나도 이런 장면이 상영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쨋든 혼자서 조직 전체를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검술은 인정.
닌자 어쌔신은 이런 킬빌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보면 된다. 킬빌보다 조금 더 잔인한데, 무시무시한 느낌은 훨씬 크다. 정말 까닥 잘못하면 순식간에 죽을 것 같다. 총이라는 무기가 이렇게 허약한 것인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킬빌은 훤한 대낮에 싸우는 장면이 많아서 잔인함은 부각되지만 무서운 느낌은 덜한데 닌자 어쌔신은 어두운 실내에서 순식간에 팔다리가 날아가니까 그 공포감이 대단하다. 칼솜씨도 기대를 훨씬 넘어섰다. 비가 이렇게까지 무술을 잘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장면도 간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닌자 떼의 습격이다. 닌자는 원래 하나 아니면 둘이 움직인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많은 숫자로 들키지 않고 움직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십 명씩 동원하는 것 자체가 좀 오바였고, 그 많은 숫자와 라이조 혼자가 제대로 싸우는 것도 좀 무리한 설정이었다. 또 하나는 재생 인술(?)이다. 나루토에서도 츠나데나 카부토 정도나 보여주는 재생 인술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쓰는 것은 액션의 사실감을 강조한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좀더 다양한 닌자 무기가 제대로 등장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살짝.
어쨋든, 액션으로만 따지만 칼싸움 나오는 영화 중에는 역대 최고인 듯 하다. 킬빌과 300, 와호장룡의 장점을 모은 듯한 액션이다. 킬빌을 재밌게 봤다면 닌자 어쌔신에 감탄할 것이다. 하지만 킬빌 보면서 뭐야? 하는 반응을 보였거나,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안 보는 게 좋을 듯.
보면서 문득 생각이 난 것은 디워. 디워가 이 정도의 연출력을 갖췄다면 스토리고 뭐고 다 없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일기장/2009-11-18
며칠 전에 백업 파일을 뒤적거리다가 내가 드레퓌스를 리포트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그 전문성에 대한 연구로 인용한 것인데, 4년 전 일이다. 그런데 실용주의 사고와 학습을 번역하면서는 전혀 기억이 안 났었다니 참 당황스럽다.
나는 개발자로서 드레퓌스 모델에서 어느 정도의 단계에 있을까? 드레퓌스 모델은 다섯 단계 novice, advanced beginner, competent, proficient, expert로 나뉜다. expert, 과연 어느 정도가 되면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관점으로 본다면 어떨까. 나는 열 살 때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개발 경력은 20년이 넘은 셈이다. 실무 경력은 8년. 대학 4년. 하지만 대학 4년 동안 내가 프로그래밍을 열심히 했던 과목은 세 과목 정도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한 게 없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거의 프로그래밍을 하지 못했고, 초등학교 때 접했던 시간도 2년 가량이다. 고등학교 때 1,2학년 때까지 올림피아드다 뭐다 했으니 이 때는 좀 밀도가 높았다. 그렇게 보면 대략 13년을 좀 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쨋든 시간으로만 따지면 1만 시간도 넘고, 10년도 넘으니 내가 제대로 했다면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만 deliberate practice, 혹은 깨달음을 얻는 경험이란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처음 배웠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MSX에서 베이직으로 배웠는데, 그 때 얻은 깨달음으로 기억 나는 건 단 하나. 뭔가 동작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나서 거기에 살을 붙여나가는 것이 처음부터 정확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좀더 쉽다는 것. 나름 애자일의 기본 원리 중 하나를 깨우친 것 같아 기특하기도 하다. ㅎㅎ 그래서, 그 이후로 프로그래밍을 할 때 Hello World를 찍는 수준이라도 뭔가 돌아가게 만든 다음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해왔던 것 같다. 처음부터 BigDesignUpFront와는 인연이 없었던 듯.
그리고 GW-BASIC으로 넘어가면서 새로 얻은 깨달음은 GOSUB의 사용이다. GOSUB와 RETURN을 잘 이용하면 코드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부분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초보적인 함수의 개념을 익혔다고 볼 수 있는 듯하다.
그 이후로는 별다른 발전이 없다가 고등학교 때 올림피아드를 하면서 조금 발전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문제를 시각화하면 코딩하기 쉽다는 것. 미로 찾기 문제를 풀 때, 다른 친구들은 모두 결과를 좌표값을 연속해서 찍는 것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ASCII 그래픽으로 미로를 그리고 미로를 따라가는 선을 그려서 화면에 보여주는 식으로 구현했다. 처음에 화면 그리는 코드를 짜는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그게 되고 나서는 내가 짜는 알고리즘이 화면에 바로바로 보여서 쉽게 풀 수 있었다. 하노이탑 문제를 풀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 아예 그래픽 모드까지 사용했고 이외에도 다양한 알고리즘 문제를 시각적으로 풀었다.
하지만, 이 방식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올림피아드에서는 내가 갖고 있는 라이브러리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각화를 이용할 수 없었고 시각화에 다소 의존해왔던 터라 알고리즘적 사고는 그닥 발달하지 않아서 결국 국내 예선에서도 탈락하고 말았다. 사실 고등학교 때 알고리즘은 거의 대학교 수준 이상으로 공부를 했었지만 프로그래밍 실력은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 때 역시 별다른 발전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진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실무를 하면서부터다. 그렇게 따지면 실무를 하기 이전의 세월들은 시간만 많지 세 건 정도의 깨달음 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보면 13년에서 실무 이전의 5년은 다시 그냥 1년 수준으로 봐야 할지 모른다. 그럼 이제 전문가에 필요한 10년에 모자란다.
실무를 하면서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처음에 SI 업체에서 구를 때는 불평도 많이 하고 힘들어했지만 사실 그 때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자바 한지 1년 만에 자바서비스넷의 엔지니어 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당시 존경 받는 개발자들과 함께 자리할 수 있었으니 인정도 받은 셈이다. 권일이를 통해서 XP도 배웠고, 리팩토링처럼 전환점이 된 책도 읽었다. 하지만 이 때도 회사가 사운이 기울면서 프로젝트를 못 따서 막판에 5개월 정도는 별 일 없이 보냈다. 또다시 마이너스 5개월.
NHN으로 옮기고 나서도 나름 충실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TDD를 시작했고, 페어 프로그래밍 등 XP의 각종 실천법도 적용을 해보았다. 어려운 과제들을 많이 맡으면서 개발 실력도 부쩍 늘었고, 사내 관리 도구를 만들면서 UX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 때는 별로 감점 구간이 없는 듯 하다.
NCSoft에서도 많은 배움을 얻었다. 가장 큰 것은 프로젝트 관리에 대한 것을 배운 것이다. XP의 실천법들을 의욕적으로 적용해보고, 또 실패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들이 크다. The Goal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맞아들어가는 것도 볼 수 있었고, 작은 프로젝트나마 다른 직종이 포함된 팀의 PM을 해보면서 다른 직종의 관점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스프링노트의 고민을 통해서 UX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발전했다. 기술적으로도 자바스크립트, 파이썬, 장고를 완전히 흡수했고, 루비도 개념적으로는 꽤 깊이 이해했다. 이아스님의 일단 부딪혀보는 실천적인 스타일, 지섭이의 품질에 대한 집념, 장호의 무식하지만 빠른 개발방법 등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창업을 결심할 만큼의 자신감을 얻게 된 것도 결국 오픈마루 덕분이다. 그렇지만, 여기도 감점 구간이 있다. 에쿠스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굴러가고 권남님이 다른 프로젝트로 차출된 후부터는 의욕을 많이 잃어서 마지막 3~4개월은 새로운 시도를 그만두고 요청 들어오는 것만 작업했던 것 같다.
이렇게 따져보면 내가 개발자로서 발전적인 시간을 보낸 것은 대략 8년 좀 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전문가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좀 부족한지도 모른다. 이번에 안드로이드를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자신감이 많이 붙었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이 분야에 잘하는 개발자가 드물어서 그런 것 뿐이다. 아마 내가 오픈마루에서 같이 일했던 개발자들 누구를 데려와도 이쪽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어디 가서 내가 전문가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말아야겠다.
일기장/2009-11-04
이제 이콜레모도 창업한지 2년이 되어 간다. 2년, 이제 더 이상, 창업한지 얼마 안되었어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콜레모는 진도를 얼마나 나갔는가? 거의 나가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창업 초기랑 비교하면 사무실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고 재정적으로도 여유 있다고는 말 못하지만, 숨은 쉴 수 있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콜레모는 회사로서, BUILT_to_LAST에서 이야기하는 비전기업으로서 얼마나 진도를 나갔는가. 우리는 비전 기업들처럼 이념지향적인가? 비전기업처럼 문화가 정착되었는가? 비전기업처럼 도전적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내가 창업하는데 용기를 주었던 BUILT_to_LAST, 너무 쉬워 보였다. 그래, 눈앞의 돈보다 이념을 중시하고, 자신만의 꿈과 비전을 쫓다보면 돈은 따라온단 말이지? 다들 그렇게 아무 것도 없이, 꿈만 가지고, 몇 백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창업을 해서 저렇게 큰 거란 말이지?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네. 그까이꺼 뭐. 근데 그렇게 쉬워보이는 것들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 버는 게 어려웠냐고? 물론, 그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진정으로 어려웠던 것은 우리의 이념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이었다. 당장 사무실 월세를 낼 돈이 궁한 상태에서 이념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고, 우리 회사의 비전에 맞는 일이 아니라, 돈이 되는 일을 선택했다. 물론, 돈 되는 일을 선택하면서도 조건은 까다롭게 걸었다. 파견 근무도 하기 싫고, 비용도 단가 잘 받아야 되고, 되도록 턴키여야 하고 등등.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이념과는 크게 상관 없는 조건이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조건은 가치 있는, 자랑할 만한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 프로젝트인가, 사회 공동체의 민주화에 기여하는가가 되었어야 했다. 이것이 우리의 이념이니까.
결국, 우리가 이제껏 걸어온 길은 돈만 쫓는 벤처기업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길이 되었다. 그렇다고 돈을 시원하게 번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냥 돈만 보고 달렸다면 지금쯤 몇 배는 벌었으리라. 돈을 보고 달린 것은 아니나, 돈에 휘둘리기는 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것들이 결국 이콜레모를 정체 상태에 있게 만든 듯 하다.
이콜레모가 아니라 이콜레모의 구성원 개개인으로 본다면 꽤 성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내 경우는 개발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 이콜레모를 창업할 당시만 해도 내가 잘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세계 최고 수준과는 거리가 좀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거치면서 개발 실력은 엄청나게 는 느낌이다. 아직 이론적인 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실전 개발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하지만 내가 키워야 했던 능력은 개발 실력이 아니라 사업 실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쨋든 사업이라는 것은 나 하나가 개발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 정확히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뭔가 사업 실력 같은 게 필요한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실력이 필요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사업하면서 사업하려면 이러이러한 것을 잘해야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런 이야기 중에는 별로 취할 이야기가 없었다. 뭔가 시계를 만드는 능력, 그리고 사람들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능력, 그런 게 필요한 것 같다.